-킴, 환영하네. 배에 오른 이상 이제 자네도 그린피스 선원이야. 그린피스 선원들은 뭘 하든 절반은 액티비스트야. 절반은 항해사, 절반은 액티비스트. 절반은 요리사, 절반은 액티비스트. 절반은 선원의 일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액티비스트란 말이지. 그러니 자네도 이제 액티비스트라는 걸 명심하게. (…) 어쨌든 뭐, 그렇다. 나는 원래부터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좋아했고, 지금부터 반은 설거지 꾼, 반은 액티비스트, 그러니까 환경운동가다.
--- p.16~17, 「절반은 항해사, 절반은 액티비스트」 중에서
그린피스 일원이 되려면 꼭 채식을 해야 할까? 환경운동은 완벽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건가? 나는 휘발유차를 신나게 몰고, 내 아버지는 온실가스의 주범이라는 한우를 평생 기르셨다. 그린피스가 추구하는 방향에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그저 막연한 기대와 어느 정도의 소명 의식으로 레인보우 워리어에 올랐을 뿐이다. 막상 배 안에서 부딪혀 보니 환경을 보호하는 방법은 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건, 결국 내 행동이 가져올 책임을 생각한다는 것. 사소한 귀찮음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과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수고면 충분한 것 아닐까. 양파를 썰고 눈물을 흘리며 어쩐지 그런 생각을 했다.
--- p.21, 「눈물의 채식」 중에서
파나마를 떠나 칠레를 향해 남쪽으로 항해를 시작한 지 이틀쯤 지난 오후였다. 어디서 갑자기 ‘쿵쿵쿵’ 발소리가 몇 번 요란스럽더니 배 전체에 방송이 들렸다.
-고래, 고래, 고래. 선수 우현 1시 방향.
안내 방송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 흥분이 담긴 발소리가 ‘쿵쾅쿵쾅’ 하더니 함성이 들렸다. 궁금해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모습에 탄성이 터졌다. 배 오른쪽으로 커다란 향유고래가 스무 마리도 넘게 보였다.
--- p.73, 「지구온난화와 나 사이의 거리」 중에서
땅끝, 지구 반대편 푼타아레나스의 크리스마스 전야는 그렇게 깊어갔다. 갑판 난간에 기대어 도시를 바라봤다. 멀리 남극에서 불어오는 차고 습한 바람, 황량한 초원. 그 언저리에 자리 잡은 평화롭고 아담한 도시는 어두운 불빛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이곳은 딱 1년 전에 화물선을 타고 지나갔다. 당시에는 내가 여기에 다시 와서 이리 즐거운 날을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삶이 생각지도 못하게 흐르는구나 싶었다.
누구를 만나 어떤 일을 하느냐가 삶을 좌우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서로 돕고 격려하며 행복을 나누는 것, 마음 맞는 동료와 힘을 합쳐 혼자라면 못할 일을 해내는 지금 이 바다 위의 하루하루가 나는 좋다.
--- p.90~91, 「배 안의 시크릿 산타」 중에서
강변까지 나무가 울창해서 숲 사이를 날아가는 기분이다. 창문을 열자 아무 데서도 맡아본 적 없는 짙은 숲 향기가 들이쳤다. 선원들은 ‘음-하- 음-하-’ 숨소리를 내며 밀림의 향기에 빠졌다.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면 등이든 발이든 정수리든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태초의 지구가 이랬을까? 청량한 공기. 그 공기는 갖가지 나무와 풀의 채취로 가득했다. 나는 이 신선한 공기를 아낌없이 들이마셨다. 햇살, 공기, 바람, 하늘. 소중한 건 다 공짜다. 신비한 밤을 가르며 배는 앞으로 나아갔다.
--- p.93, 「콩 콩 콩」 중에서
피아노를 조립하자 루도비코가 그 앞에 앉았다. 따뜻한 물통을 쥐고 손을 녹이던 노신사는 차가운 공기에 손가락을 내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공기 중에 퍼지자, 바삐 일하던 스무 명이 한순간 얼어붙었다. 마치 향기에 취한 것처럼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연주에 빠졌다. 하늘에는 새들이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주변의 얼음 조각은 물의 흐름을 따라 서로 부딪히며 이리저리 움직이지만, 사람들은 마네킹처럼 꼼짝없이 굳었다. 차갑고 잔잔한 대기로 사람들의 입김만 스르르 퍼져나갔다. 그 준엄한 침묵 속에서 노신사의 연주만이 북극의 대기로 퍼져나갔다.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 p.117, 「루도비코와 빙하를 위한 노래」 중에서
-킴,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내가 봐도 한자는 아닌 것 같아.
-이리 줘봐. 어! 어…. 아…. 이건… 이건… 코리안이야….
데이비드가 건넨 플라스틱 통 바닥에는 넘어져도 일어나는 우리나라 식품 기업의 이름이 흐릿하게 각인돼 있었다. 닳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다. 3L 정도 되는 하얀 통은 마요네즈를 담았음이 분명하다. 통은 버려진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표면이 거칠게 일어났고, 온통 이끼가 붙어 있어 미끈거렸다. 데이비드는 기록지 한쪽에 ‘한국 쓰레기’란을 추가하고 막대기 하나를 그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형광등 조각, 플라스틱 바가지 등 한글이 적힌 쓰레기가 줄줄이 나왔다.
--- p.134~135, 「한국 쓰레기, 중국 쓰레기, 일본 쓰레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