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고 해서 우리는 빛나는 별을 찾는다. 하지만 별은 어둠을 바탕으로 빛나기에 어둠은 어둠으로만 남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블랙’은 블랙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다. ‘느리게 출현하고 끈기 있게 성장’하는 나무처럼 인류에게 자정 능력을 일깨우고, 결핍에서 깨닫게 된 지혜로 더 풍성한 연대감을 갖게 할 것이다.
‘지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요행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일 속에 관심이 피어나면 지혜가 열린다.’라는 스님 말씀처럼 일상생활의 익숙한 것에도 관심을 두게 될 때,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들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겨울 추위는 나무에게 가혹한 시련이다. 하지만 흙이 어는 일은 물길 찾아 끊임없이 뿌리를 뻗으려는 나무에게 ‘강제 휴식’을 취하게 하는 보호막이 된다고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한 생각을 믿고 좋은 것은 갖지 못해 애태우고, 싫은 것은 버리지 못해 괴로워하는, 업식의 넝쿨손을 걷어주며 겨울나무는 말한다. 침묵하라. 씨앗처럼.
큰 나무 건 작은 나무 건 이파리가 크든 작든 나무들이 만들어 준 고마운 그늘에 들어가 잠시 숨을 고른다. 스마트폰을 아바타처럼 끼고 살고, 하루 대부분을 모니터 세상에서 생활하며 소음에 익숙해져 버린 몸의 센서는 고요에 대한 경외감 대신 두려운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숲 그늘은 곧 숨으로 돌아오게 한다.
촘촘한 나뭇잎 틈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처럼 희고 붉고 노란 꽃들이 보인다. 꽃은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피어있다. 밝은 꽃, 어두운 꽃, 차가운 꽃, 따뜻한 꽃이 따로 있으랴. 누가 꽃을 보고 지저분한 꽃, 깨끗한 꽃으로 나누는가. 우리는 그저 아기처럼 꽃으로부터 ‘예쁘다!’라는 말을 배운다.
단풍든 나뭇잎 한 장에 고스란히 녹아있는 빛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짙은 초록으로 시작해서 연노랑, 감빛 노랑, 붉은 노랑, 검붉은 빨강으로 물든 빛의 걸음을 따라간다. 빛의 걸음이 지나간 그 길에는 ‘봄의 소쩍새 울음과 먹구름 속의 천둥과 간밤에 내린 무서리’와 밤잠을 설치며 뒤척이던 누군가의 고뇌가 스며있다고 나직이 일러주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가을비 그치면 단풍은 빛을 쫓던 걸음을 멈추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누구나 이런저런 상처를 받게 된다. 내 안에 옳다고 정해진 게 많을수록 상처도 많다. 그 상처를 보는 인식에 따라 맑은 기운도 되고 어두운 기운도 된다고 하니 상처를 아우른 흔적이 곧 그 사람만의 향기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선원에서 귀에 못이 박이게 들은 말씀. 고(苦) 앞에서 ‘그냥 바라보기’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얼마나 아플지, 어떤 모양으로 변할지, 미래의 걱정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누가 상처를 냈는지, 왜 나에게 이런 상처가 왔는지, 과거의 후회로 도망가지 않는다. 내 탓, 남 탓으로 도망가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수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침향나무의 지혜를 새긴다. 침향나무는 상처와 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놔두는 것이다.
나무는 폭풍우 시달림을 온몸으로 버티며 이파리를 지켜냈어도, 때가 되면 나뭇가지로 나르던 물길을 끊어버린다.
백전백패일지라도 괴로움에 처했을 때 수행의 비결은 ‘지금’하는 것임을 절박하게 가슴에 새긴다.
경전이나 수련 메모를 한 글자 한 글자 연필로 베껴 쓰다 보면 글씨 쓰는 소리가 만트라처럼 들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뜻을 쫓아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리만 귀에 가득 찬다. 때마침 눈이라도 내리면 글자들이 눈 내리듯 소복소복 스산한 마음을 덮어준다.
나무는 어느 것과도 비교하지 않고 ‘지금’에 온전히 자신을 맡겨버린다. 얼음장 밑이거나, 폭풍우 치는 밤이거나, 자신 앞에 닥친 시간과 공간을 외면하지 않고, 오직 살고자 하는 의지 하나로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인연 자락에 나도 숨을 쉰다.
머뭇거리는 사이, 불안이 덮친다. 하지만 나는 늑대가 아니다. 머뭇거림. 멈칫, 멈춤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생각에 싸여 고정되어 있던 의식을 흔들어 새로운 눈으로 앞을 보는 기회가 온 것이다.
산 비탈길에 멈춰 서서 내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본다. 아주 오래전의 내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눈길에 찍힌 발자국마다 내가 서 있었다.
너는 거기에 그냥 있어라. 나는 다시 걷는다.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저마다의 이름을 달고, 저마다의 빛깔로, 저마다의 향기로 생의 절정 노래를 부르고 있다.
선원에서도 수백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고 주신 말씀이 바로, 수행자의 삶은 ‘쓰고’, ‘놓고’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자 의식주의 모든 선택은 단순하고 극명하다. 수행에 이익이 되면 쓰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놓는다. 수련 노트에 반복해서 적어놓은 말씀을 다시 읽어본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