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늦었던 것 같다. 아버지에게, 친구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아직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지 못한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내내 나를 지켜봐 주던 이들의 기다림 내에 닿지 못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늦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게 허락된 시간 내에 닿지 못할까 봐 두렵기도 하다. 내게 늦음과 느림에 대한 찬양 따윈 없다. 그냥 내 늦음과 느림 안에서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순간순간일 뿐, 나도 늦는 내내 일찍 당도하고 싶었고, 느린 내내 빠르고 싶었다.
--- p.22
자신의 존재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기다려 낼 수밖에 없는 시간들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존재의미다. 당신이 유용해서 사랑하는 건 아닐 테니까. 아니 어쩌면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언제나 유용한 당신인지도 모르고….
--- p.24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겨 나온 사람도 있을 테고, 늘 작은 접이식 우산을 챙겨 다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전에 깜빡하고 사무실에 두고 간 우산을 펼친 사람도 있을 테고…. 갑작스레 내린 비였지만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는다. 비는 결코 내게만 내리지 않지만, 나만을 적시는 경우는 있다. 구름은 때가 되어 비를 내리는 것일 뿐, 어떤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내리는 것도 아니지만, 지상에서는 행운과 불운이 그렇게 갈린다.
--- p.39
현대인이 안고 사는 정신의 병은, 그렇듯 각자의 풍경과 스스로의 스토리텔링을 지어 올리는 데에 서툰 능력에서 기인하는지 모른다.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과 쇼윈도가 배열된 거리, 도시는 우리의 의식을 디스플레이하는 하나의 인격이다. 도시의 표상들을 만끽하며 사는 것이 과연 우리의 욕망일까? 아니면 도시가 우리를 숙주 삼아 저 자신의 풍경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화된 욕망일까?
--- p.66
먼 미래에서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또 무엇을 모르고 있을까? 그런데 삶이란 게 또 그렇지 않나? 대강을 미리 알고 있는 반복조차도, 수월하고 무난한 ‘다시’인 건 아니니까.
--- p.86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에서 읽은 내용, 빨강머리 앤은 자신이 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점으로 든다. 까망머리의 얘는, 같은 실수를 늘상 반복한다. 그쯤 되면 그건 그냥 성격이라는 거다.
--- p.95
그렇듯 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내가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깨닫기 전까지는,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모른다. 또한 전혀 불편하지도 않다. 그래서 계속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거라는….
--- p.106
혼자만의 사랑이 힘든 이유는, 나 혼자서 상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그 역시 나를 마음에 두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은 아닐까? 내 착각이고 미련이었을지언정, 닫지도 놓지도 못하는 그 일말의 가능성으로 인해…. 그러나 상대방의 거절로 그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은 다른 열망과의 사이에서 끝내 고백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언제고 이루어진 적 없는, 나만의 슬픔으로 묻혀 버린 이야기를 ‘지나간 사랑’으로 기억한다.
--- p.123
행운이란 놈은 언제나 ‘바깥’에서 치고 들어온다. 그것들은 늘 ‘뜻밖에’ 혹은 ‘예상 밖의’ 속성으로 다가오지 않던가. 불운이 그러하듯….
--- p.202
파리가 자주 꼬이걸랑, 파리를 원망하기 전에 자신이 똥이란 사실을 깨닫길…. 성배에는 성수가 담질 것이고, 술잔에는 술이 담길 것이다. 담겨질 내용물에 대한 기대보다 먼저 자신이 어떤 잔인가를 깨닫는 성찰과 통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 p.208
조금이라도 더 산을 아는 자는 산에 있는 자가 아니라 하산한 자다. 오히려 아직 오르지 않은 자와 같은 위치에 있다. 때문에 아직 산에 있는 자는 그를 낮게 보고, 아직 올라 보지 않은 자들은 같게 본다.
--- p.233
강자가 항상 강자의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고, 약자가 늘 약한 것도 아니다. 권세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굴욕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어떤 입장이건 간에,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을 때, 그 칼을 어떻게 쓸지 고민해야 한다. 위협의 도구로 사용할 것인지, 포박된 끈을 끊어 줄 것인지….
--- p.255
때로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왜 오르려는지의 이유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오르니 나 역시 무작정 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라는 공동의 목적을 향해서 오늘도 우리는 오르고 있다. 행복의 정의는 더 이상 자신이 행복하다고 믿는 상태가 아니다. 남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행복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 p.259
그렇게 해서 달래질 수 있을 것 같은 정당한 분노라면야 그렇게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게다. 그렇지 않을진대, 차라리 자신의 격이라도 지켜 내는 게…. 지금 써 내리고 있는 그 카톡을 전송하지 말라!
--- p.289
어느 순간이 어떤 미래로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기에, 일단 최선을 다해 보며 매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결을 거스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 채 거슬러 보다가도, 또 되어 가는 대로의 결에 따라 다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렇듯 불확실성은 모든 가능성이란 피로도이기도 하다.
---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