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 43. 좋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대필작가, 대필작가로서도 실패한, 막 일용직 가사도우미가 된, 이런 나를 내 가족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외로운 사람, 꽤 증오가 깊은 사연 있는 악플러, 다소 고지식한 연상의 먹물 아내, 1년 전 아이를 유산한, 조울증이 있는 며느리 독한 년, 좋은 출판사에 다니는 제일 예쁘고 제일 자랑스럽고 제일 가여운 딸, 언제부턴가 거기 있어도 타인의 기억에 남지 않게 된 투명인간, 공부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고 공상하기를 좋아하고 인간을 좋아했던, 지금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중년의 어린애, 이렇다 할 이름 없는 자질구레한 고통들을 끌어안은, 자살카페 회원, 가파른 내리막길 위에 서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아주 평범한, 순하지는 않아도 선한, 선했던 여자.
--- p.9, 「인물人物」 중에서
강재 27. 아무튼 부자가 되고 싶은, 모두의 오빠, 아들, 주로 대부분은 모두의 애인, 그런 역할대행서비스 운영자, 최저시급 10만 원, 스스로 1인 기업가라 부르는, 호스트였던, 연상에게 늘 인기 있는, 상대가 스스로는 가질 수 없을 시간을 파는 남자, 아마도 아버지를 닮았을, 엄마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들, 보통의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친 세상에 두 발 당당하게 꽂고 서 있는,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인 친구, 또 누군가에게는 어른인 척하지만,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여린 남자친구, 어떤 이에게는 제비처럼 겉만 번지르르한, 실속 없는 젊은 애, 지금 있는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 갖춘 사람들과 섞이기 위해, 위험을 감당하며 더 가파른 계단을 뛰어넘으려는, 아직은 아버지도 필요하고 엄마도 필요한 청년의 어린애, 마음 한 곳에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소중히 남아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 앞에서 방향을 잃어가는, 얼마 전까지 소년이었던 남자.
--- pp.14~15, 「인물人物」 중에서
#54 창숙의 골목. 밤
부정│아부지. 이 박스 좀 이제 그만 주우러 다니면 안 돼? 이제 어디서 사가지도 않는다면서.
창숙│왜 안 사가. 그래도 사갈 사람은 다 사가.
부정│아부진 뉴스도 안 봐? 이제 30원도 안 된다는데… 고생만 직싸게 하구…
창숙│(버럭) 아이구 아부지 직업인데 왜 그걸 하라 마라 해. 내가 너 출판사 그만 나가라고 하면 좋냐?
부정│……
쉬던 몸을 일으켜 가져온 박스를 원래 있던 박스와 합쳐서 묶으며,
창숙│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
부정│둘은 뭔데…
창숙│이게 돈 되는 일 같았으면 아부지 차례까지 오지도 않어.
벌써 큰 기업에서 차 불러다가 다 걷어갔지.
비싸져서 괜히 줍는 사람 많아지는 것보다 아부진 지금이 한결 나니까 잔소리 하지 말어.
부정│(잠시 아버지 보다가, 일어나 거들며) …그래도 힘들잖어…
창숙│세상에 힘 안 드는 일이 있냐… 너 하는 일은 쉬워?
부정│……
창숙│힘들지?
부정│……
창숙│다 그러고 사는 거여.
--- pp.96~97, 「1부 인간의 자격」 중에서
#20 모텔. 503호
잠시 부정 보다가, 먼저, 앉은 채로 침대에 풀썩 눕는 강재.
가만히 보는 부정. 누운 채로 잠시 천장을 보다가, 눈을 감는.
강재│이런 말 처음 해보는데…
부정│……
강재│얘기를 듣다 보니까… 생각이 나서요…
부정│……
강재│난… 정반대였거든요. 근데…
하고 눈을 뜨는 강재.
강재│그게 결국 같은 얘기 같아서…
부정│……
강재│난… 집에 있어도… 또 집에 가고 싶었거든요.
부정│……
강재│아주… 어릴 때부터…
해가 질 때쯤에… 집에… 방에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으면
심장으로… 이상하게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가요…
부정│……
강재│그러면… 방금 밥을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배가 고픈 거 같기도 하고…
가족이랑 있는데… 분명히 엄마랑 있는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부정│……
강재│견딜 수가 없어져요…
부정│……
강재│집이니까 집에 갈 수도 없고…
엄마랑 있으니까 엄마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돌아버리는 거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부정│……
강재│근데… 지금 가만히 들어보니까…
그때 그게 결국 이런 거였네…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부정│……
강재│어떤 사람하고… 가만히… 누워 있고 싶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같이…
--- pp.407~409, 「7부 Broken Hallelujah」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