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거리, 만 개의 집과 지붕, 지하실, 골목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은 도시에서 두려움에 떨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갔다.
그런데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나타난 뒤로 제트파에게 명확한 목표와 싸울 대상이 생겼다. 그리고 이 도시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을 뺀 모든 이에게 훨씬 안전한 곳이 됐다. 이 도시에 멋대로 기어들어 온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어떤 불평등도 죄다 감수해야 하는 존재였다.
--- p.15, 「그들은 널 사랑하지 않아」 중에서
어느 날 밤 홀로 전철을 타고 가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제트파 대장 노릇을 해도 지워지지 않는 열등감 때문에 토니는 늘 마음 한구석이 괴로웠다. 그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아는 게 없었다. 잘난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얘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쿨했지만 그건 대단한 장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게 있나? 별거 없었다. 그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었다. 지금처럼 살았다가는 평생 무지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토니는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었다. - pp.69~70, 「너한테만 얘기할게」 중에서
마리아는 삼면거울 앞에서 한쪽 발로 바닥을 디디고 빙글 돌았다. 거울 속에서 그녀의 모습이 여러 개로 늘어났다. 아니타가 서 있는 자리에서는 마치 흰 옷 입은 발레단이 순수의 춤을 추고 있는 듯 보였다. 마리아는 오빠에게 손짓을 하며 깡충 뛰어갔다. 베르나르도는 어렸을 때처럼 웃고 있었다. 오늘 밤은 정말 멋진 밤이 될 거라고 마리아는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아니타를 흉내 내듯 치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치노의 뺨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게 다였다. --- p.92, 「오늘 밤 춤을 추고 싶어」 중에서
그의 손가락이 소녀의 등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그의 어깨에 닿은 그녀의 손은 가볍고 섬세했다. 토니에게 이끌려 한 바퀴 돌고 난 그녀는 그의 손이 몸 가까이에 붙자 살짝 떨며 물러섰다. 마치 그를 두고 떠나려는 듯이. 토니는 잠시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가 풀어주었다.
두려워할 거 없어, 라고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이 세계는 그도 처음 와본 곳이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이 세계는 푸른 들판이 펼쳐지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곳, 아름다운 새들과 향긋한 꽃이 가득한 따뜻한 곳이었다. 구름 위를 걷고 있는데도 그들은 추락하지 않았다. 음악 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 p.105, 「이 심장을 어떻게 하면 좋지?」 중에서
토니는 식당 창밖 너머,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서 깜박거리는 신호등을 쳐다보았다. 마치 위험을 경고하면서 천천히 반응하라고 알려주듯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블록 끝 쪽에서는 망가진 네온사인이 발작적으로 탁탁 소리를 냈고, 지나가는 자동차에서 날카롭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거리의 정적을 한 번씩 깨고 있었다.
--- p.152, 「너희는 다 겁쟁이들이야」 중에서
베르나르도와 리프는 칼을 이리저리 움직여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천천히 움직였다.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머리를 굴리면서 상대를 속이는 동작을 취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갔다. 오래 끌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둘 다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먼저 한 번 찌르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두세 번 찌를 것도 없었다.
--- p.190, 「우린 싸우지 않아도 돼」 중에서
“난 세상만물을 사랑하고 싶어. 내가 아는 것들뿐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들과 사람들, 앞으로 보거나 만날 일 없는 존재들까지 전부 다. 이해할 수 있어?”
토니는 열기와 그림자로 무겁게 가라앉은 어두운 방 안을 돌아보았다.
“우리를 봐. 우리는 살고 사랑하고 죽는 존재야. 그 모든 게 너무 빨리 일어나버려.”
마리아는 손가락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말을 막았다. 하이힐을 신고 빠르게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 이윽고 주방에서 정신없이 외쳐대는 아니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 p.223, 「넌 내가 사랑하는 남자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