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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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28쪽 | 368g | 140*210*20mm |
ISBN13 | 9791192085036 |
ISBN10 | 1192085035 |
발행일 | 2021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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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28쪽 | 368g | 140*210*20mm |
ISBN13 | 9791192085036 |
ISBN10 | 1192085035 |
MD 한마디
그리스와 로마로 상징되는 고대와 세계사를 선도한 근대에 비해 유럽의 중세는 어둡게 그려진다. 흑사병, 십자군전쟁 등 중세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혼돈과 퇴보다. 과연 그럴까? 남종국 교수는 이 책에서 중세의 다채롭고 역동적인 풍경을 설명하여 편견을 바로잡고자 한다. - 손민규 역사 MD
I 중세라는 이상한 세계 아리스토텔레스를 금하라/ 잃어버린 고전과 책 사냥꾼/ 전염병보다 무서운 가짜 뉴스/ 흑사병에 맞선 의사와 도망친 교황/ 흑사병을 물리치는 수호성인/ 중세 유럽인들의 이상한 뼈 사랑/ 잠자리까지 통제한 사회/ 성욕은 죄악이다/ 불임은 악마의 계략/ 불의 심판/ 기적을 행하는 왕/ 종교재판을 받은 「최후의 만찬」 II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일하는 자/ 바야돌리드 논쟁/ 판도라와 이브/ 멈추지 않는 마녀사냥/ 신의 이름으로, 십자군전쟁/ 낙인찍기/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삼위일체를 부인하다 화형을 당하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같은 신을 숭배한다/ 연옥, 중세 최고의 발명/ 지옥을 이용하는 종교/ 이자는 죄악이다/ 상인은 결코 신을 기쁘게 할 수 없다/ 파라다이스가 사라졌다/ 설교자, 중세의 아이돌 III Miscellanea, 역사의 상상 고려 왕에게 편지를 보낸 교황/ 네로, 성군인가 폭군인가/ 사비니 여인 납치 사건/ 중세 최악의 가짜 뉴스/ 역사를 위조하려는 자들/ 브루노, 종교개혁의 또 다른 주인공/ 16세기 베네치아의 위기와 기회/ 베네치아와 날개 달린 사자/ 번역의 힘/ 1438년 피렌체, 2019년 하노이/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참고문헌 |
중세가 암흑시대였다는 인식은 이젠 구닥다리가 된 것 같다. 많은 저자들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중세를 암흑시대로 기술했던 근대의 저자들 사정도 이해가 간다.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자들, 볼테르가 대표하는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가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서는 그들이 건너온 시대를 불살라야 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보기에 중세의 많은 생각과 행동들, 제도가 맘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우리가 보기에도 중세는 비이성적이었다. 아무리 그 시대가 ‘암흑’은 아니었다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빛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발전의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고 하지만 분명 지금과는 다른,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았다. 모든 것의 중심에 신을 두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더라도 성인들의 뼈에 대한 광적인 집착은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잠자리까지 통제했던 것에는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왕의 손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은 과연 정직한 것이었는지 의심해보고 싶다. 마녀사냥은 하도 많이 얘기해서 이제 무덤덤해질 정도이지만(사실 마녀사냥은 근대 초입에 더 격렬하게 벌어졌다는 걸 주경철 교수의 책을 통해서 알고 있긴 하다), 그 시대에 마녀라는 낙인이 찍혀 비참하게 죽어간 힘없는 여인들을 생각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많은 가짜뉴스는 또 어떻고? 중세의 신권이 실제로는 가짜뉴스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가짜 문서가 횡행했다.
남종국 교수의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는 이와 같은 중세의 모습을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쓴 책이 아니라(신문 칼럼을 모았다-<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단편적이고 조금은 산만해 보이지만, 중세라는 역사와 현대, 특히 우리나라의 상황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역사를 보다 가깝게 여길 수 있다.
방금 그 역사, 중세를 보다 가깝게 여길 수 있다고 했는데, 사실은 이 부분이 어쩌면 이 책의 중심이 아닌가 싶다. 중세가 이토록 이상해 보이는데, 결국은 그 이상함이 현대의 우리에게도 투영된다는 사실 말이다. 여전히 가짜뉴스로 대중의 인식을 왜곡하거나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며, 여전히 여성이나 장애인 같은 약자들에 대한 혐오를 키우고 있으며, 교회가 흑사병을 더 퍼뜨렸던 것과 같이 우리의 일부 종교시설도 그런 전철을 밟았으며, 작은 종교적 교리의 차이를 두고 죽자 살자 덤비고 있다.
책 제목은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라고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 책은 아직도 중세를 벗어나지 못한 현대인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경고가 아닐까 싶다.
제목을 잘 붙였다.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라는 제목은 두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데, 하나는 중세가 뭔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으며, 현대인들이 그에 대한 일종의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 이 책이 그런 오해를 풀어줄 수 있는, 그러니까 당신을 자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의도대로 책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좋았을 것 같다. 계몽주의 시대의 오만했던 저자들이 중세에 대한 평가를 난도질 해 놓은 건 멍청한 짓이었고,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이어온 근대인들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서 그런 내용을 충분히 다 풀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염려가 들긴 했고, 그건 사실이 되어버렸다.
우선 책은 중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큰 이유는 저자가 현대의 기준으로 중세를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세와 오늘 우리의 시대 사이에는 천 년이라는 세월이 놓여있고, 당연히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잘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생각과 판단을 했는지를 풀어나가는 것이 ‘오해’를 해소하는 방법일 텐데, 이 책의 저자는 이걸 매우 단면적으로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하면서, 중세의 무지함을 비판하는 논조를 자주 보인다.
어쩌면 이건 저자가 박사학위를 받았다던 프랑스 학계의 분위기일지도 모르겠다. 세속주의와 유물론에 기초한 연구 방식은 자신 또한 특정한 사상적 조류(혹은 편견) 위에 서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채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여기에서 나오는 부작용, 정확히는 부주의가 있는데, 바로 신앙 같은 인간의 사고 부분에 대한 부족한 이해다.
저자는 여러 부분에서 중세 유럽의 주요 신앙체계였던 기독교를 비판한다. 물론 당시 기독교회는 완전무결하지 못했고(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에도 (당시로서는 그것이 정당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합리적인 사고체계가 작동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마녀사냥의 경우, 그저 중세 기독교의 멍청한 판단 때문에 발생했고, 과학적 사고 발달하면서 비로소 사라졌다는 식의 서술이 보인다. 이게 정말일까? 사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적지 않은 수의 마녀사냥이 일어났고, 비슷한 종류의 마녀사냥은 양자역학의 시대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좀 더 깊은 데서 찾아야 할 텐데, 그런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신문에 실리는 칼럼을 모은 책이기에, 각각의 내용은 매우 짧게 편집되어 있고, 그 안에서 깊은 논의를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해는 된다. 또, 신문의 특성상 어느 정도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의 연결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은 비약도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싶고. 저자의 정치적 입장이 크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좀 더 중세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긴 하다.
1. 내용: 기대와 현실
“중세를 ‘오해하는’ 현대인에게”란 제목 때문이었을까. ‘중세시대=암흑시대’란 기존의 관념 혹은 오해를 이 책이 과감히 깨뜨려주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암흑이란 단어에 그동안 가려졌던 중세 시대의 찬란함과 화려함이 이 책을 통해 당당히 드러나길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색상으로 묘사되어왔던 중세의 이미지가 밝은 색상으로 채색되는 모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내 개인적 기대가, 독서가 끝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대의 모습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중세에 대한 내 오해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었거나, 저자가 지칭하는 ‘현대인 그룹’에 내가 속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막상 책 속에서 발견한 중세는 내가 기대했던 밝은 색상이 아닌, 어두운 남색, 어두운 갈색, 어두운 청록색 등 그 색상만 다채로울 뿐, 여전히 짙고 어두운 색으로 가득 묘사되어 있으니 말이다.
2. 형식: 소개? 혹은 교훈
이 책에 실린 40개에 가까운 에세이들이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거의 항상 지켜내는 형식이 있다. “중세의 풍경을, 글의 말미에선 현대의 모습과 엮어낼 것!”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역사를 배운다는 점에서, 중세와 현대를 엮어내는 시도만큼은 그 자체로 높은 의의가 있다고 본다. 다만 기껏해야 마지막 한두 문단에 할애되는 현대 이야기는, 중세 이야기와 결속되어 나름의 의미를 도출하기엔 그 근거와 분량이 빈약하여 갑작스러울 때가 있다. 가령, 글의 중후반까지 중세의 이색적인 면모를 ‘소개’하던 저자가, 돌연 마지막 문단에 이르러서는 현대의 이야기를 꺼내더니 시대를 관통하는 ‘교훈’으로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는 식이다. 독자의 입장에선 한창 중세 풍경과 이야기에 스며들고 있는 찰나, 갑작스레 현대 사회의 소용돌이 속으로 등 떠밀린 격이다. 결과적으로 혼란만이 남는다. 중세와 현대가, ‘소개’와 ‘교훈’이 물과 기름처럼 쉬이 섞이지 않는다. 중세와 현대의 본질적 모습이 제아무리 닮았더라도 두 세계를 보다 차근차근히, 동시에 보다 탄탄히 엮어주었으면, 하는 형식적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