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리에서 북스 키친을 운영하는 유진은 휴남동 서점을 운영하는 영주와 닯았다(<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리뷰 참고). 그녀들은 한때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에 몰두했고 사회적인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길을 잃고 방황하며, 이제껏 소중했던 인연에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새로이 시작하겠다는 듯 익숙지 않은 곳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그것도 책과 함께 하는, 만들어 가기 시작한다. 책 한 권, 한 권을 직접 고르며 만든 그 곳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안고 찾아온 사람들을 보듬어 위로하고 그들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커다란 건물이 전면에 등장하는 책의 표지부터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루어진 구성까지, 지난번 리뷰를 남긴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에서도 투덜거렸듯 요즘 출판계 유행이라고 해야 할 듯한 비슷비슷한 모양새가 책을 읽기 전 진입장벽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니 어느새 유진과 북스 키친 고객들의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소양리 북스 키친은 책을 팔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북 카페와 책을 읽을 수도,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북 스테이를 결합한 복합 공간으로 총 4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북 스테이 공간은 건물 3개 동으로 만들었는데 각각 2층짜리 독채 펜션이었다. 북 스테이용이 아닌 나머지 건물의 1층은 북 카페로 사용하고 2층은 스태프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구성했다. p.5
‘소양리 북스 키친’이라는 이름을 정하는 데도 2주가 넘게 걸렸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 맞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책마다 감도는 문장의 맛이 있고 그 맛 또한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 생각났다. 각각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추천해 주듯 책을 추천해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이 되듯 책을 읽으며 마음을 쉬어가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북스 키친’이라고 이름 붙이게 되었다. 맛있는 책 냄새가 폴폴 풍겨서 사람들이 모이고, 숨겨뒀던 마음을 꺼내서 보여주고 위로하고 격려받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p.7
책 속 인물들이 위로를 얻듯 마음에 닿는 책과 함께 마음을 쉬어가는 ‘북스 키친’에서 나 역시 며칠간 풍경을 눈에 담고 책멍을 하며 쉼을 만나고 싶어졌다.
1장 - 할머니와 밤하늘
2장 - 안녕, 나의 20대
3장 - 최적 경로와 최단 경로
4장 - 한여름 밤의 꿈
5장 - 10월 둘째 주 금요일 오전 6시
6장 - 첫눈, 그리움 그리고 이야기
7장 ? 크리스마스니까요
총 7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예측 가능한 전개와 결말로 이우러져 긴장감이 덜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고민의 어느 부분과 닿아 있어 친근하기도 하다.
서른이 되는 자신의 모습이 예전 기대했던 그것과 달라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기대했던 이 나이의 내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투덜거리던 내 모습을 엿보기도 했고,
서른 살을 코앞에 둔 지금의 모습이, 자신이 스무 살 때 상상했던 서른 살의 모습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었다. 서른 살에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의 모습일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실크 블라우스에 검은색 치마를 입고 세상의 어려운 일은 다 해결하는 슈퍼우먼의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했는데, 현실은 4년 내내 자잘한 업무만 처리하는 막내 자리였다. p.27
여전히 알 듯 말 듯한 내 인생의 방향과 속도를 고민하는 내게, 인생의 경로를, 속도와 방향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모습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각자가 꽃피우는 방식은 다를 수 있고, 인생의 경로는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는 건데 말이죠. 조금이라도 길을 벗어나면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굴러요. 누가 지시한 경로도 아닌데.” p.54
인생은 100미터 달리기 경주도 아니고 마라톤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게 아닐까. 삶이란 결국 자신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을 찾아내서 자신에게 최적인 길을 설정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p.54
그리고 속이 시끄러울 때면 책을 꺼내들어 그 속으로 도망을 가는 내 모습과 닮은 그들을 만나며 반가움에 미소짓기도 했다.
“그 이후부터는 우울하거나 화가 나면 정신없이 빠져 읽을 수 있는 책을 집어 들었어요. 탐정 추리 소설이나 판타지 이야기 같은 거로요. 소설 속 세계에 빠진 순간만큼은 진통제를 삼킨 것처럼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책의 세계에 빠져 있다 보면 등장인물이 문득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것 같거든요. ‘인생에 참 어이없는 일이 많이 생기지? 진짜 이 정도일 줄 몰랐지?’ 하고요.” p.89
책 속에서 유진이 추천하는 책들을 하나둘씩 적다 보니 이렇게 쌓인 책들을 한 권, 한 권 읽어도 좋겠다 생각도 들었다(그 중 한 권인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를 최근 읽기도 했다).
메이브 빈치 <그 겨울의 일주일> / 최은영 <밝은 밤> / 고수리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델리아 오언스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 루시드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 김혼비 <다정소감> / 김하나 <힘 빼기의 기술> / 윤가은 <호호호> / 최민석 <꽈배기의 맛> / 최민석 <꽈배기의 멋> / 장기하, <상관없는 거 아닌가 > / 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 에쿠니 가오리 <나비>
책의 말미에 적힌 ‘작가의 말’을 읽으며, 나 역시 그러했다고 그리고 아직도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노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제는 남들의 거대한 항공기를 부러워하는 대신 프로펠러가 탈탈거리는 거친 소리를 내며 나는 내 작은 비행기도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어찌보면 소심하고 (자칫 뒤쳐져 보이기까지 하는) 중얼거림을 되뇌어 본다.
돌아보면 나의 삼십 대는 항공기 대기 라운지를 닮아 있었다. 인생의 경계 지대에 예상보다 오랜시간 머물러야 했다. 내가 예상했던 스케주로가 달리 계속해서 ‘지연’과 ‘연착’이 되었고, 때로는 ‘비행 취소’ 사인이 올라온 날도 있었다. 결혼, 이직, 업무, 육아라는 파도에 허덕이면서 마음이 끝없이 시끄러웠다. 남들이 로켓처럼 거대한 항공기를 타고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고, 때로는 우아하고 민첩하게 환승에도 성공해서 다른 세계로 사라지는 동안, 나만 계속해서 대기자 명단에 남이 있는 기분이었다. p.129
*기억에 남는 문장
각자 섬처럼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일상을 살아가지만, 바다 아래 깊은 어딘가에 서로의 감정이 비슷한 멜로디로 연결된 것 같았다. p.49
비오는 여름밤에는 마법 같은 힘이 깃들어 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마음속 우물 깊은 곳에 자리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길어내고 싶어지는 시간이었다. 햇빛 찬란한 한여름의 낮에는 침묵을 지키던 어떤 감정이 비가 퍼붓는 밤에는 모습을 드러냈다. 뭘 얘기해도 빗물에 씻겨 내려가 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뭘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마음속 우물이 가득 채워져서였다. p.50
“적도 위쪽 세상에서는 북극성이 변치 않는 지표가 되잖아요. 절대적이고 변치 않는 기준처럼. 다들 그 기준을 따르는 게 장상적인 삶이라고 믿고 살죠. 그런데 적도 아래 세상에서는 정상의 기준이 다르더라고요..(중략)..그러니까...... 정상적으로 산다는 기준이 꼭 하나는 아닐지도 모르는 거라고요.” p.53
금세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여행이니까 그냥 다른 사람처럼 굴어도 크게 상관없겠다 싶었다. p.86
사진에는 그날의 온도, 습도, 냄새, 들었던 노래, 기분, 생각들이 일시 정지된 채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진들은 쓸쓸해 보였다. 사진은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존재처럼, 모든 상황이 변해버린 이후에도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스산하고 어두운 쓸쓸함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든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애틋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뒤돌아보게 되는 종류의 쓸쓸함이었다. p.95
때로는 그리운 마음이 눈송이처럼 그 사람에게도 내려서, 그도 문득 유진을 떠올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각자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일을 하지만, 그리운 마음속에서 언제나 만날 것이다. 그런 그리운 마음들이 쌓이고 쌓여 이야기의 물줄기를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p.96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은 흔적에 기대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몰라.”
(중략)
자신이 엄청난 사랑을 받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런 사랑을 받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했다. 깊은 겨울의 시간을 걸어갈 때 언 발을 녹일 수 있는 따스함이, 누군가의 비난을 견뎌낼 수 있는 용기가, 이어지는 실패와 거절의 하루를 꾹 참고 지나 보낼 수 있는 인내가,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흔적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사람은 불완전하고 사랑은 완전하니까. p.115
어떤 감정은 언어로 도저히 전해지지 않는다.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와 울먹이는 눈동자로 가까스로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pp.117-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