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루는 처음부터 내 친구인 마오리만을 바라보았다. 당연하다. 도루는 내가 아니라 마오리에게 용건이 있었으니까. 나는 단지 조연이었고, 마오리의 친구 혹은 그저 여학생 A였다. 그런 등장인물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단지 여학생 A가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 p.15
“와타야 선배는 절절한 사랑 같은 건 안 해봤을 것 같아요.”
한순간, 선배가 놀란 표정을 보였다. 그때야 내가 얼마나 실례되는 말을 한 건지 알아차렸다. 당황해서 사과하려 할 때, 선배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모를 뿐이야.”
“네?”
와타야 선배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무척, 슬퍼 보였다.
--- p.31
당시 나는 절친인 마오리를 도루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살짝 질투가 났다. 그 감정이 가리키듯이 어디까지나 도루는 마오리의 남자친구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애 감정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나처럼 어딘가 냉담해 보이고 순수문학을 좋아하며 집안일과 요리를 잘하는 특이한 아이. 그런 도루에게 연애 감정을 갖게 된 것은 더 나중의 일이다. 동경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을 아주 조금 마오리에게 품게 된 것도 훗날의 일이었다. 도루에게……, 키스를 하게 된 것도.
--- pp.57~58
눈앞에 앉은 남녀가 가만히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손이 움찔거렸다. 너무 뻔뻔하진 않을까. 불쾌하게 여기진 않을까. 긴장하면서도 과감히 와타야 선배의 손을 잡았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사랑은 죽을 것 같은 애절함이며 상대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고 갈망하는 마음이라고. 그리고 연애의 가장 큰 행복은 거기에 있다고.
--- pp.84~85
“그럼 와타야 선배가 고등학교 때 누구랑 사귀었는지 아시겠네요? 지금도 선배, 그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 같던데.”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던 것 같다. 그것이야말로 전혀 뜻밖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이즈미가 고등학교 때 누군가와 사귀었다고? 살짝 혼란스러웠다. 그게 정말일까?
--- p.118
“고마워 마오리. 나와 친구가 되어줘서.” 나는……, 몰랐다. 이즈미가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무언가를 아끼고 있었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고 가슴속 깊은 곳에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이즈미의 내면에는 빛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빛이. 어쩌면 이즈미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광원 같은 것이 그녀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는 고등학교 시절의 그녀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이즈미는 어디서 그것을 손에 넣었을까. 어디서 찾아낸 것일까. 언제, 달라진 걸까.
--- p.137
나는……, 어땠던 거지. 고등학생 때, 좋아한 사람은 없었을까.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애가 있었기에 그럴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일기에도 딱히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기억장애에서 회복된 뒤 아무에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건 왜일까. 아무리 다정하고 아름다운 남성을 봐도, 믿음직스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을 만나도 내 마음은 반응한 적이 없다. 마치 이미 소중한 누군가가 마음속 한가운데 있기라도 한 것처럼.
--- p.139
지금 여기에 마오리는 없다. 나는 혹시 용서받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 어디에도 남기지 않을 테니. 도루와 나만의 추억을 만들어도 괜찮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말 없이 도루를 바라본다.
---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