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례
페퍼민트 007 작가의 말 266 |
저백온유
관심작가 알림신청백온유의 다른 상품
시원쌉쌀한 풀잎 향이 퍼져 나갔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로 끼쳐 왔다 시안은 매일 페퍼민트 차를 우린다. 몇 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를 위해서다. 6년 전 시안의 가족이 전염병 ‘프록시모’에 감염된 뒤, 엄마는 회복되지 못하고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다. 나아질 가망이 보이지 않는 엄마를 포기할 수 없는 마음과 간병 생활의 괴로움, 문득 지겹다는 생각을 하고 만 뒤 몰려오는 죄책감까지, 시안을 괴롭히는 감정은 다양하다. 어린 시절 가족과 다름없이 지내던 사이였지만 병을 옮기고 잠적하여 사라진 해원을 다시 만났을 때, 시안의 감정은 어떠할까? 스스로도 분명히 말할 수 없는 소용돌이를 품은 채 엄마도 건강히 회복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해원을 만나면서, 시안은 ‘열두 살로 돌아간 것처럼’ 웃고 애틋해지다가도 해원의 입시나 남자 친구 고민을 듣고 있을 때면 같아질 수 없는 두 사람의 상황을 자각하고 만다. “내가 깜빡 존 사이에 엄마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마음을 넌 모르겠지. 해원의 빡빡한 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낙오되어 있는지 실감했다. 보통 사람들의 진도를 죽을 때까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 미래에 실망하게 되었다.” 본문 71면 하지만 평범한 일상을 사는 듯 보이는 해원에게도 깊은 불안이 있다. 농담으로 던진 ‘병을 옮긴다’는 말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지원’이라는 흔한 이름으로 개명까지 했지만 자신의 과거를 사람들이 알까 봐 늘 조마조마하다.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아는 시안이 나타났을 때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는 듯 보였던 해원의 세계가 다시 요동친다. 작가는 이처럼 위태로운 관계에 놓인 시안과 해원의 감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원망과 거짓, 죄책감과 불안이 마주치며 만들어 내는 팽팽한 긴장을 포착하는 묘사가 돋보이며, 각기 다른 입장에 처한 두 사람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고르게 몰입하여 곁에 머물게 만든다. 내일을 살아낼 우리를 위해 밝은 자리로 이끄는 용서와 화해 시안의 페퍼민트 차는 엄마를 위한 돌봄의 차이기도 하지만 지친 시안에게 “여유와 평화”(190면)를 주는 차이기도 하다. “20대의 이시안과 30대의 이시안, 40대의 이시안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소변 통을 비우는 모습을 내가 상상하고”(211면) 마는 숨 막히는 현실이지만, 작가는 엄마의 간병인 최선희 선생님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슬퍼하지 않기를, 그리고 돌봄이란 모두가 지나야 할 시기임을 받아들이고 미리 상상해 보기를 주문한다. “너무 슬퍼하지 마.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너는 조금 일찍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 봐.” 본문 191-192면 시안은 그런 미래를 상상해 보고, 최선희 선생님과 함께 두려움과 슬픔을 나누며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것을 느낀다.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라는 시안의 말은 그래서 더욱 아프고 간절하다. 있을 것 같지 않던, 준비할 수 없었던 미래를 상상하는 일은 멈춰 있던 시안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처한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나누었던 사랑을 기억하며 지금을 살아 내는 일. 이를 통해 상상할 수 없던 다음을 찾아내는 일. 시안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성장을 의미하며, 매일을 살아 내는 우리 모두의 성장과도 다르지 않다. 햇볕 속으로 나아가는 시안의 발걸음을 살피는 작가의 시선은 미덥고 다정하다. 한국문학의 젊은 미래 백온유 작가가 선보이는 또 하나의 성장 소설에는 많은 돌봄이 등장한다. 아이를 돌보고 강아지를 돌보고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엄마를 돌본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의 삶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깨달음으로 모아진다. 전작 『유원』에서 생존자들이 떠안는 죄의식을 들여다보았던 작가의 시선은 이번 작품에서 일반적인 일상의 세계가 붕괴되고 나서야 보이는 돌봄의 자리로 향한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121면)라며 질문을 던지는 시안의 독백이 엄마의 간병이 지우는 무게와 다르지 않게 서늘하게 들리는 것은 그런 이유다. 공백이 있고 나서야 보이는 돌봄의 중요성은 일상을 떠받치는 것들에 대해 질문해 온 오늘의 한국문학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지점과 닿아 있다. ‘회복과 생존’에 이어 ‘돌봄과 생명’으로 향하며 문제의식을 갱신하고 있는 작가의 감각을 주목할 만하다. 한국문학의 밝은 미래를 예고하는 작가의 두 번째 발걸음을 뜨겁게 응원하게 되는 수작이다. ▶ 줄거리 열아홉 살 시안은 학교가 끝나고 매일 병원에 간다. 식물인간 상태로 늘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서다. 엄마는 몇 년 전 온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전염병 프록시모에 감염된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전문 간병인 최선희 선생님과 시안, 아빠가 돌아가며 엄마를 돌보지만 엄마는 깨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족만은 특별하다고, 서로를 지켜 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움직이지 않는 엄마의 손발을 주무르고 엄마의 소변 통을 비울 때마다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 열아홉 살 해원(지원)은 평범하게 남자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다닌다. 하지만 매년 프록시모 백신 접종을 할 때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이 떨린다. 해원의 가족이 슈퍼 전파자가 되어 지역 사회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 후로 해원은 ‘김지원’이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개명하여 동네를 떠나 자신을 아는 사람들을 피해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남들처럼 남자 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입시를 준비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안은 우연히 해원의 오빠 해일을 마주치고, 잠적 후 일상을 회복하며 살고 있는 해원의 가족 이야기를 듣는다. 다시 일상을 회복하고 있다는 말에 시안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한때 쌍둥이 자매처럼 지냈던 해원을 찾아간다. 엄마가 회복되었다고 속인 채 해원에게 접근해 예전처럼 가까워지며 과거의 좋았던 추억과 현재의 고통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시안. 돌이킬 수 없이 갈라져 버린 두 가족의 상황을 견디다 못한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의 상황을 알리고 오래도록 고민하고 시달렸던 어떤 일을 해 달라는 제안을 하는데……. ★★결말 포함 줄거리(스포일러 주의)★★ 시안은 해원에게 엄마의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부탁한다. 충격을 받은 해원은 시안의 부탁을 거절하지만 엄마를 간병하는 시안을 지켜보고 도우며 고민이 깊어진다. 해원은 엄마에게 시안을 만난 일과 시안의 가족이 처한 상황을 털어놓는데, 엄마로부터 시안네의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시안의 집에 찾아간 해원은 앞으로도 자신이 간병을 돕겠다는 말을 꺼내다 시안과 다투고 시안의 엄마만 있는 집에 홀로 남겨진다. 그때 시안의 아빠가 예정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고, 당황한 나머지 옷장에 숨은 해원은 시안의 아빠가 괴로워하며 시안 엄마의 호흡기를 끄는 장면을 목격한다. 갈등하던 해원은 뛰쳐나가 시안의 아빠를 말리고, 시안 아빠는 경찰에 체포되어 구치소에 수감된다. 시안은 아빠를 말린 해원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서로를 위해 다시는 만나지 않기로 하고 헤어진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엄마 덕분에 내가 안정적인 유년기를 보냈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늘 나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 주었다. 나는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다. 보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세뇌한다. 본문 28면 내가 깜빡 존 사이에 엄마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쏟아지는 잠을 쫓는 마음을 넌 모르겠지. 해원의 빡빡한 일정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시작한 후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얼마나 낙오되어 있는지 실감했다. 보통 사람들의 진도를 죽을 때까지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내 미래에 실망하게 되었다. 본문 71면 사실 시안이 무작정 찾아온 그날, 해원은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는 시안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속들이 다 아는 인간이, 최악의 모습까지 다 아는 인간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담스럽고 수치스러웠다. 본문 77면 엄마는 고여 있는 것 같다가도 우리 삶으로 자꾸 흘러넘친다. 우리는 이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 것이다. 우리는 썩을 것이다. 아빠가 썩든 내가 썩든 누구 한 명이 썩기 시작하면 금방 두 사람 다 썩을 것이다. 오염된 물질들은 멀쩡한 것들까지 금세 전염시키니까. 본문 121-122면 가만히 해원의 기분을 짐작해 보았다. 해원의 슬픔까지 천진하다고 생각하는 내가, 해원이 겪는 이별이나 시험마저 질투하는 내가 싫었다. 문득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아졌다. 본문 124면 “너무 슬퍼하지 마.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한평생 혼자 살지 않는 이상, 결국 누구 한 명은 우리 손으로 돌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 될 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너는 조금 일찍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 봐.” 본문 191-192면 우리는 재난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병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게 마지막 대화라는 걸 알았다면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건넸을까? 엄마는, 우리는,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다. 본문 220면 아프면 위로받아야 하는 거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그 말이 해원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해 주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나를 돌봐 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 편히 아플 수 있다는 것을 해원은 깨달았다. 본문 226면 그때, 누군가의 숨결 같은 바람이 등을 떠밀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그늘을 벗어나 한걸음, 햇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본문 265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