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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 없는 세계

[ EPUB ]
백온유 | 창비 | 2023년 04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7 리뷰 102건 | 판매지수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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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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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년 04월 10일
이용안내 ?
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
파일/용량 EPUB(DRM) | 90.66MB ?
ISBN13 978893641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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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뉴스로 보는 책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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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이는 게 쉬운 줄 알아? 특히 나 같은 애는 웬만해서는 안 믿어주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 상대방이 납득할 만큼 내가 아파줘야겠지? 그쪽에서 의심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게 내가 망가져야 되는 거야. 제대로 부러지고 제대로 찢겨야 사람들은 ‘사고를 냈구나’ 겁먹고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주거든.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죄책감 같은 거 별로 안 들어. 나는 사람 속이려고 아픈 척 연기하지 않거든. 그 순간에 나는 진짜로 아파. 존나 아파서 죽을 것 같아.”
---p.27

성연과 다니며 건물 화장실이나 층계참에서 웅크려 자는 밤에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뭘 해야 할까 고민했다. 곧 그런 고민들은 우리에게 사치이며 지극히 보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할 만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61

경우는 안전한 공간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지냈다. 경우와 지낼수록 나는 궁금했다. 특유의 신중함과 타인을 향한 예의를 과연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 스스로 터득했다기에 그 태도는 너무도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었다. 사랑을 받은 만큼 고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내가 이 모양이 된 이유가 명백해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경우 같은 존재는 왜인지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p.101

내가 선택해서 집 밖에 나와 있는 거라고 믿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일찍이 내쫓긴 것을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거실에 우뚝 서서 이상한 기분으로 그 순간을 마음에 새겼다. 거실 통유리로 한껏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먼지와 함께 부유하는 고양이 털, 거실 벽에 걸린 아버지의 독사진, 발바닥에 느껴지는 온기.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 순간을 곱씹어보면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p.107~108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반복되는 일상을 저버리지 않고 평화를 일구는 법은 누가 알려주는 걸까. 그런 게 체득이 되는 인간들은 다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걸까. 동이 틀 무렵 창가에 어른거리는 고양이 그림자를 눈으로 좇으며 우리는 망했다고 홀로 중얼거렸다.
---p.198

당연히 내가 베푸는 입장에 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이번에도 타인에게 의존하려 하고 있었다. 이호가 돌아온다면 황량한 거리에 내팽개쳐진 채 햇볕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지 않아도 되겠지. 그런 희망을 품으며 애써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내 영혼은 이미 오래전에 동사한 것 같기도 했다.
---p.204~205

눈앞이 흐릿해지고 나서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라는 것도. 소매가 축축해질 정도로 닦아내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다. 경우였다.
“여기서 뭐 해. 집 가자.”
“어디가 우리 집인데?”
나는 새삼스럽게 물었다.
“우리가 지내는 곳. 지금은 거기가 우리 집이지.”
---p.221~222

경우를 향한 내 마음을 채반에 받쳐 거른다면 무엇이 남을까. 너무나 많은 불순물들이 섞여 있어 나조차도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p.228

하나만 묻고 싶다. 우리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니.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너무도 간단하게 묶어버리는 말. 어머니는 어느 정도 억울하고 비통해 보였다. 내 부모의 결정적인 실수는 무엇일까. 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어머니를 차단했다. 이제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없었다.
---p.247

이호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묶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에요.”
“뭐가.”
“누가 내 신발 끈 묶어주는 거요.”
나는 멈칫했다.
“어릴 때. 누군가가 묶어줬을 거야. 네가 기억 못할 뿐이지.”
---p.259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후회를 곱씹는 일에만 성실히 복무했다. 아무것도 갈구하지 않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삶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소심한 방식으로 사과를 건네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건 경우가 전혀 바라지 않는 방식일 테지.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삶이라고 내가 아무리 주장해봤자 나는 살아 있다. 아무리 떨어도 내 체온은 36.5도인 것이다. 이 반성 없는 몸으로 앞으로도 살아가겠지.
---p.261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불어왔다. 나의 심연에서 바람이 휘돌며 서서히 내 몸을 녹였다. 이런 온기를 오래전부터 꿈꿔왔지만 막상 따스함을 느끼니 내게는 이런 안온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 것 같아 괴로워졌다. 하지만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부디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지기를. 햇볕을 쬐면 정화되기를. 경우 없는 세상에서도.
---p.261~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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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 자는 잊었다. 자신이 어떤 시간과 사건을 뚫고 여기에 이르렀는지. 찢겼다 회복된 살. 부러졌지만 다시 붙어 크고 단단해진 뼈. 자기 자신을 성장시킨 어른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지만 남을 성장시키기로 결심한 이야기는 소중하다. 해피엔드의 주인공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이의 슬픈 하루를 기쁨의 내일로 바꾸려 애쓰는 각오가 좋다. 나의 성공으로 남의 절망을 함부로 대체하지 않는 마음이 좋다. 한권의 소설이 이 비정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책을 덮고 조금 성장한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정용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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