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김
-민영: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김씨들이 모여 가장 효용 없는 한 사람을 추방하자 회의를 했다.
-정희: 민
-민영: 민영아.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변호하고 싶었다.
-정희: 영
-민영: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 p.12
정희, 냉장고 문을 열어 안을 구경한다.
-정희: (냉장고 속 푸딩을 집어 냄새를 맡으며) 오. 푸딩 있네?
-민영: (놀라서 뒤돌아보며) 아야, 그거 누구 줄 거야. 그거 빼고 진짜 다 먹어.
정희, 푸딩을 제자리에 내려놓는다. 푸딩 외에 파, 다진 마늘, 레몬, 불고기 양념 소스 통만이 있는 텅 빈 냉장고 안.
--- p.73
삶은 그들이 약초의 박사가 될 때까지 숲속에 있도록 인내해 주지 않을 것이다. 스무 살의 세 사람은 저마다의 숲을 내면에 품은 채 세상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상태로, 자기모순의 혼란을 앓으며, 그럼에도 이들은 매일의 발걸음을 뗄 것이다.
---「이소영, 한 시절의 마음을 매기다」중에서
깜깜한 방 안에서 민영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마치 물결치듯 정희도 따라 웃기 시작한다. [성적표의 김민영] 속 고등학교 시절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다. 그들은 대체로 서로를 잘 이해하는 듯 보이는데, 그 이해는 말을 경유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더 정확히는 서로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본 적 없는 관계다. 매일 같이 지낼 때 비언어적 소통으로 서로를 이해한 부분이 컸다는 사실을, 열아홉 살에는 굳이 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누구의 잘못, 결정적인 큰 사건이 아니라 이런 미묘한 순간들이 [성적표의 김민영] 속 갈등을 만들어 간다.
---「이다혜, 멀어지는 것들 사이의 네 얼굴」중에서
어쩌면 정희는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더 깊은 나’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그가 가끔 꿈꾸는 삶은 깊은 숲속에서 홀로 약초를 캐며 사는 삶이다. 사람들에게는 잊힐 즈음 자신은 약초 박사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은둔을 희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세상을 알고 싶어 한다. 민영에게는 ‘사차원’으로 보이는 다소 엉뚱한 정희는 오히려 제 삶을 매우 현실적인 차원으로 구축한다. 민영의 현실적 충고와는 결이 다른, 정희가 만드는 현실이다.
---「이라영, 관계의 시차」중에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 자체가 훗날 민영이 정희에게 보내는 거대한 반성문으로 보였다. 사실 민영은 그렇게까지 별로인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위해 참외며 햇반을 한가득 싸 온 친구에게 현관문조차 잡아 주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성적 정정을 하느라 ‘그렇게까지’ 정희를 내팽개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제론 멀리서 온 정희를 위해 맛있는 한 끼를 해 먹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가면서 10년 전 자신을 돌아봤을 때, 정희에게 못되게 한 행동만 기억나는 것이다. 만약 10년 뒤 민영의 곁에 정희가 없다면, 그날의 기억은 영원히 그렇게 멈출 수도 있다.
---「서솔, 회고록의 김민영」중에서
앞으로도 세 명은 서로 다른,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영원히 “그때 우리 같았으면 좋겠어”라는 바람은 세월에 닳아질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가진 꿈이, 현재의 상황이, 모순된 태도가 아무리 가볍게 보여도 무시할 수 없다. 딱히 누군가가 덜 절실하다고도 말할 수도 없다. 알 수 없는 불안, 막연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그다지 희망적일 수만은 없는 기다림을 가진 열아홉과 2분의 1살이 가진 젊음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 열아홉과 스무 살 사이, 완전하지 못한 미묘한 우정은 그렇게 현재진행형이다.
---「이의진, 열아홉과 스물 사이, 불완전한 우정 보고서」중에서
사실, 이 장면 말고도 참 솔직해서 안쓰럽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참 많다. “이런 감정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인지 알아?” 하며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그 장면들이 나에게 ‘위로’가 됐다면, 관객분들껜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 정말 궁금하다. 어떤 감정에서든 문득 꺼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영화, 그런 마음이 들면 언제든지 일기장 펼쳐 보듯 볼 수 있는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이 관객분들께 그런 영화가 되면 좋겠다.
---「김주아, 안쓰럽고 사랑스러운 감정들에게」중에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앞으로 바삐 나아가는 것도, 제자리에 머무르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모두 가치 있다.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게 살아가는 것도, 때로는 세상을 뒤집어 상상해 보는 것도 모두 의미 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인 우리 모두는 늘 가식과 형식에 둘러싸여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겠지만, 영원히 이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아무도 한심하다고, 덜 절실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우리 영화가 그런 위로를 주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다.
---「윤아정, 가끔은 미워하고 늘 좋아했던 김민영으로부터」중에서
아주머니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정희는 혼자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조금은 비장하게 대답하잖아. 그 대사는 정희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확신이 있는 사람이기보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은, 더 당당해지고 싶은 사람이라는 해석에서 나왔던 것 같아. 사실 그 장면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자격지심’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정희식의 자격지심. 그런데 이 표현이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 건, 이 단어를 정희에게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인 거 같아.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조금 더 따뜻하고 사려 깊은 단어를 써 주고 싶어. 그래서 단단해 보이는 정희가 ‘내면에 가지고 있을 약간의 불안감’, ‘확신을 가지고 싶은 마음’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재은·임지선, 성적표의 뒷면」중에서
나는 여태까지 성적표에서의 핵심은 ‘한국인의 삶’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어제 다시 생각하면서, 그리고 우리는 진짜 영화를 한 100번은 봤잖아. 그 100번을 보면서 다시 이 부분을 생각했을 때, 성적표의 “마음과 행동 A: 내가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아, 그렇구나’ 하고 이야기를 들어 줌.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를 봐 주고 있다는 느낌.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을 때가 있어.” 이 항목이 더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게 영화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라는 생각도 들고. ‘있는 그대로 봐 주는 시선’. 어쩌면 이게 인간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게 아닐까. 다른 말로는 ‘신뢰’, 다른 말로 ‘용서’인 것 같기도 한데. 있는 그대로 상대를 본다면 사람 사이에 정말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아.
---「이재은·임지선, 성적표의 뒷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