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페르시아만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3국의 반도체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반도체에 대한 전 세계 산업의 의존도는 날로 심화되고 있다. 언제든 새로운 혁신 기술이 나타나면 지금의 지배 기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 반도체 업체들 간의 치킨게임으로 언제든 공룡 같은 업체들이 하루아침에 쓰러지거나, 어제까지 적이던 업체들이 합병하여 새로운 경쟁 구도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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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이어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일본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2010년대 들어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기술 전쟁, 중국의 공격적인 반도체 굴기 투자, 미국의 자국 반도체 산업 보호, 대만의 굳건한 파운드리 지배를 비롯하여 하루하루 달라지는 시스템반도체 생태계 등을 생각하면,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언제든 외부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다. 타이밍에 맞게 필요한 내부 개혁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한국 역시 일본이 걸었던 것과 비슷한 쇠망의 길을 갈 가능성이 상존한다. 일본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흥망성쇠를 살펴볼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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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일본의 굵직한 반도체 업체들의 쇠망사에는 공통적인 패착이 관찰된다. 일본 반도체 왕국의 패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큰 패착은 기술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과 그로 인한 세계 시장의 변화에 대한 대응력 저하다. 두 번째 패착은 혁신의 딜레마다. 시장을 압도하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 혁신 기술이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수익률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패착은 정부의 과도한 간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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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본이 노렸던 한국 반도체 산업, 특히 그 뿌리부터 흔들려고 했던 소재·부품·장비 산업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일본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들의 신뢰도 저하와 수익률 급감으로 이어지는 자충수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오히려 이를 기회로 반도체 소재의 안정적 공급망을 단기에 회복하여 성공적으로 일본에 대한 반도체 소재 의존도를 낮추고 있는 형국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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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높은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여전히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2021년 기준 16.7퍼센트 수준에 불과한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미국의 중국 기술 견제 기조로 인해 실질적인 자급률이 더 낮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2025년까지 70퍼센트의 자급률을 달성하겠다는 중국의 목표 달성이 난망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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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서는 미국의 제재 때문에 TSMC가 눈치를 보며 SMIC와 거리를 두는 모양새지만, 미국의 제재가 느슨해지면 두 회사는 언제든 다시 원래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럴 경우 TSMC가 곧 중국 파운드리 산업의 일부로 역할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제재 와중에서도 TSMC와 SMIC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면밀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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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아무리 첨단 기술, 첨단 장비라고 해도, 어느 한 나라, 혹은 한 회사가 독점하여 홀로 기술을 개발하거나 표준을 주도하는 것은 이제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규모가 큰 산업일수록 효율적인 발전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촘촘한 글로벌 공급망이 형성되고 세심하게 조율되는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 p.169~170
어떤 나라보다도 충격적인 결과는 중국에서 나타난다. 지난 20년간 중국 연구자들은 논문 편수뿐만 아니라 그 질까지 급성장했다고 알려져는 있었다. 하지만 이 보고서에 나타난 데이터는 예상을 훨씬 넘어선, 두려울 정도의 수준이다. 화학과 재료과학은 가히 세계 최강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고, 공학 전반과 수학 역시 어느새 세계적 수준이 되었다. 물리학과 지구환경 쪽도 톱클래스 등극이 눈앞에 온 것으로 보인다.
--- p.201~202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그 당시의 최고 수준의 첨단 기술을 반드시 여러 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간과 자원의 한계가 있으니 그러한 기술을 모두 갖출 수는 없으나, 반도체에 대해서라면, 특히 소재와 공정의 핵심 요소 기술을 선점할 필요가 있다. ASML처럼 아쉬운 사람이 먼저 찾아가 읍소할 수 있는, 그런 ‘슈퍼을’의 지위를 국가 차원에서도 반드시 전략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 p.220
파운드리에만 국한된 비즈니스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삼성전자 파운드리 산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반도체 제조업에서의 쌓은 미세 공정의 원가 절감과 오랜 공정 노하우를 살린 성능 개선으로,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파운드리 분야 매출액 규모 세계 2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러나 파운드리 사업 부문이 삼성전자로부터 독립된 법인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삼성전자와 경쟁 관계에 있는 업체들의 신뢰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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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이왕 대일본 소재·부품 의존도를 낮출 요량이라면, 단순히 일본을 대체할 다른 수입처를 찾는 데서 더 나아가, 네덜란드와 싱가포르 같은 강소국의 성공적인 산-학-연 네트워크를 통한 강력한 R&D 드라이브 정책을 제대로 배워 한국의 것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소재 및 부품 국산화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진 현시점이 이를 추진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 p.275
삼성의 사례에서 보듯, 한국이 만약 칩4동맹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공정을 미국에 확보해두고 이를 오히려 지렛대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삼성이 그러한 전례를 만들어두면 비단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배터리, 바이오, 자동차 등의 다른 산업이 미국에 진출할 때에도 비슷한 혜택과 법적 보호를 기대할 수 있다. 지렛대 삼아 얻어내야 하는 것은 미국 법의 보호와 기반시설 지원, 감세, 고용인원 증원에 따른 보조금 확보, 그리고 타국 수출 과정에서 미국의 기업에 준하는 관세 혜택이나 기술 IP 로열티 혜택 등이다.
--- p.298
추세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그 피해가 다른 산업, 다른 무역 채널로 전방위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굳이 부채질할 필요는 없다. 한한령이 한국 상품 전체로 확장되어 애써 가꿔온 캐시카우 시장 전체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다. 한국이 중국에 취할 대응 기조는 전선의 확대를 막는 데에 제1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며, 유출될 수 있는 기술과 인력에 대한 보호가 그다음이어야 한다.
--- p.300~301
ASML이 10년 넘는 암흑기를 버텨내며 결국 EUV 노광 공정의 실현에 성공했던 것처럼, 기업에서는 죽음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장기간의 실패 누적 기간을 학계와 연구계에서 지지할 수 있는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산-학-연 대형 장기 프로젝트의 필요성에만 역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의외의 소재와 공정이 개발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풀뿌리 프로젝트의 융성도 포함하는 것이다. 기존의 개념이 한계에 부딪혔다면 그것을 우회하거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연구들이 필요하며, 이는 대형 장기 연구보다는 중소형 장기 연구, 자유주제 공모 연구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커버될 수 있다.
--- p.305~306
따라서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인력 양성 정책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반도체 산업 자체를 타깃으로 하는 인력 양성이 아닌, 관련 전공의 교육 내실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각 전공에서 반도체 산업으로의 연계가 가능한 교과목을 개발하고, 실무에 능한 엔지니어들을 겸임 교원으로 더 적극 채용할 수 있도록 정부의 혁신 정책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
--- p.310~311
다만 2025년을 목표로 20큐비트급의 양자 컴퓨터를 개발한다는 목표는 미국의 구글이 2019년 53큐비트급의 양자 컴퓨터를 이미 개발한 것과 비교하면 큰 격차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기적으로 양자 ICT 기술은 양자암호통신, 양자암호내성통신, 양자 센서, 양자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밀접한 연관성을 바탕으로 생태계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되는 바, 현재 가장 큰 격차를 보이고 있는 양자 컴퓨터의 하드웨어 구현 및 양자얽힘 제어 가능 신소재 등에서 더 집중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p.353
급변하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정치적 상황,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기술 스펙, 혁신이 언제 어떻게 생길지 모르는 양자 ICT 같은 차세대 반도체 기술 등, 다양한 현안과 어젠다는 한국이 민간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부 차원에서도 더욱 신경쓰고 시의적절하게 대응해야 하는 부분이다. 근시안적인 맞춤형 인력 양성, 정부 R&D 과제 개발을 넘어, 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반도체 산업 생태계 다변화와 역량 강화를 위한 전략이 수립되고 정책이 개발되어야 한다. 물리학과 소재과학 같은 기초과학 분야에 더 많은 인력이 연구할 수 있는 기관과 시설, 그리고 연구 프로그램이 확장되어야 하며, 차세대 반도체 공정 기술에 대한 표준을 더 많이 선점해야 하고, 여전히 해외 의존도가 높은 장비와 소재의 자립도를 높일 수 있는 회사들이 나올 수 있는 산학연계 프로그램이 제시되어야 한다.
--- p.356~3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