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개국을 여행했습니다. 그만큼 여행의 경험을 쌓은 분들이 수천쯤 되겠지요. 글 깨칠 무렵부터 지도를 탐하고 살아온 기간만큼 지리 지식을 축적했습니다. 그 정도 인문지리 공부를 한 분들도 수천은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공부와 그만큼의 경험을 병행한 사람은 수십밖에 없을 거라는 믿음과, 여행과 인문에 지리를 섞고 감성을 묻혀 읽을 만한 책 한 권을 묶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으로, 《여행인문지리학잡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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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제일 작은 나라, 조그만 땅에 꽤나 많은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사는 나라. 지구별에서 쉬이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환경을 바탕으로 경제 성장에 성공한 나라. 그 조그만 땅이 다른 나라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로 위협받는 나라, 몰디브. 종교와 정치는 낮은 데로 임하고 국민과 환경의 가치는 높아져 가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름다운 나라가 당신이 닿기 전에 바닷속에 잠길 일만은 없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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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권은 세계 최고를 다투는, 자랑할 만한 파워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을 관광 목적 무비자로 15일, 30일, 60일, 90일, 180일 여행할 수 있지요. 그리고 지구에서 단 한 나라, 한국인이 여행 왔다고 하면 비자 없이 무려 360일간 체류를 허가하는 나라가 바로 조지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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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최대 경제국이자 브릭스의 끄트머리인 남아공. 대한민국이 부부젤라의 소음을 견디며 원정 최초 16강을 이루었던 2010년 월드컵을 치르며 여행자의 관심을 끌었으나, 길거리를 다니다 칼을 맞을 것만 같은 치안 불안으로 여행지로 보기에 조심스러워지는 곳. 하지만 말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은 당신이 알던 것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또는 경험했던 것보다도 더 매력적이라고. 남아공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를 뽑는다면, 그건 다양성 또는 다채로움이 아닐까 합니다. 다채롭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땅 위에 구현해놓은 나라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남아공의 공용어는 무려 11개입니다. 민족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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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크기의 도시 트리어와 룩셈부르크시티는 재밌는 대조가 됩니다. 로마 시대 모로코부터 잉글랜드까지를 아우르던 지역의 수도와 오늘날 유럽의 27개국 연합의 수도. 사회주의를 잉태한 철학자의 고향과 자유무역규제 철폐를 통한 생산성 향상 정책의 첨단에 선 도시. 2,000년 전 알프스 이북에서 가장 부유했던 곳과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그 둘을 함께 여행하는 데 단 4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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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대기 역으로 올라가는 텔레페리코에서 내려다보는 볼리비아 라파스의 야경은 ‘세계 최고의 도시 야경’이었다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라파스의 야경은 홍콩의, 부다페스트의, 뉴욕의 야경과 달라요. 이 산골짜기의 야경은 다시 시작할 내일 하루를 위해 꿈틀대는 가난한 이들의 하룻밤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것이니까요. 전투적으로 살아가는 라파스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은 분명 친절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고된 하루 뒤 돌아온 집을 밝히는 작은 붉은 불빛들이4000m 고지에서 흐리게 반짝이는 모습에서, 여행자는 잠시 마음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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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아레키파는 서울 4월의 아침과 5월의 한낮이 일 년 내내 이어지는 날씨를 가졌습니다. 늘 따스하지만 일교차가 큰 것이 조금 아쉽지요. 하지만 아레키파의 큰 일교차는 닿을 듯이 가까운 하늘의 충분히 따사로운 햇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합니다. 아레키파의 일조 시간은 하루 아홉 시간 이상, 일 년에 3333시간으로, 미국에서 날씨가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샌디에이고 보다 약 300시간, 서울보다는 무려 1300시간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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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위도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는 상당히 따뜻한 곳입니다. 우리나라와 반대라 할만한 건,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상당히 작은 편이라는 거예요. 아이슬란드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했지만, 우리나라의 겨울은 상당히 혹독한 편이죠. 여름도 상당히 무덥다 할 수 있고요. 겨울엔 서울은 영하 23.1도, 양평은 영하 32.6도까지 기록한 적이 있고, 여름엔 서울이 39.6도, 홍천은 41.0도(‘대프리카’는 40.0도)를 기록했었습니다. 그린란드, 북시베리아, 알래스카 등과 동 위도임을 감안하면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는 아주 온난하고 겨울에도 놀랄 만큼 따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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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보데오르노스가 지구 남쪽 끝이냐 물으신다면, 그 밑에는 디에고라미레스 제도의 독수리섬(남위 56°32′16″)이 있다고, 더 남은 게 있다면 쿡아일랜드(남위 59°29′20″)가 있는 영국령 사우스샌드위치제도를 아메리카 대륙의 연장으로 보기도 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남쪽에는 물론 거대한 얼음 대륙 남극이 있겠지요. 당신이 탐험가 아문센이나 스코트가 아니라면, 이쯤 되면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진짜 ‘끝’에 아무리 예민해도, 가짜에 의미가 없는 것도 진짜만이 중요한 것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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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의, 2030년의, 2050년의 여행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2018년보다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 될지, 또 다른 팬데믹 또는 철의 장막을 맞이할지, 백 년만의 대공황의 재림으로 여가를 논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지, 이런저런 자유 이동을 막는 새로운 장애물을 마주하다 꿋꿋하게 또 뛰어넘을지, 알 수 없지요. 하지만 사람이란 동물은, 모르고는 살아도, 알고도 못하는 건 견딜 수 없는 존재예요. 특히나 모험 세포가 한 번이라도 몸을 훑고 지나간 적이 있는 당신과 같은 여행자는, 떠날 수 있기만을 고대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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