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에는 개점 100년이 다가오는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1924년 문을 연 ‘통인가게’는 지금도 인사동의 얼굴로 한국의 고미술품부터 예술품에 가까운 생활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다. 지금은 화랑까지 운영하고 있다. 필방으로는 1913년 진고개에서 개점하여 명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옮겨온 ‘구하산방’(1920년 무렵 개점했다는 설도 있음)과 1932년 문을 연 ‘명신당필방’이 꿋꿋이 버티고 있다. 1934년 개업한 고서적상 ‘통문관’은 또 하나의 인사동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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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인사동에는 많은 상업 화랑들이 들어섰다. 1970년 4 월 현대화랑이 인사동에 문을 연 것은 우리나라 화랑 역사의 시작이다. 그때만 해도 화랑이라는 단어에 익숙지 않아서 당시 한 신문에서는 ‘그림을 판답니다’라고 소개했다. 마치 1980년대에 ‘이태원에 피자집이 생겼답니다’ 같은 기사다. 화랑이 생기기 전 인사동엔 고서점과 함께 통인가게, 고옥당을 비롯한 고미술상, 구하산방으로 대표되는 필방, 박당표구, 상문당, 동산방 등 표구점들이 자아내는 고미술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는데, 여기에 상업 화랑이 들어서면서 현대미술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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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인사동은 재화보다 문화 예술을 중시했던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가난하지만 개의치 않거나, 가난하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예술인들이 모여 예술을 논하던 곳이었다. 그들의 아지트가 하나둘 사라지고 현대적 상업 시설이 새로 들어서는가 하면, 아예 허름한 건물이 통째로 사라지고 큰 건물이 번듯하게 들어서기도 했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화랑, 표구사, 필방과 골동품 가게 등이 없어지고 천연 염색이 아닌 옷가게와 중국산 기념품 가게, 짧은 시간만 머물러야 하는 식당 등은 늘었다. 나무 기둥이 손님들의 손자국으로 반질거리던 전통찻 집이 없어진 대신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깔끔한 카페는 늘었다. 인사동이 변한 것을, 변해가는 것을 나라고 모를 리가 없다. 다만 나는 인사동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기에 놀랄 일이 없었고, 오랜만에 인사동을 찾은 그는 몇십 년 만에 흰머리로 뒤덮인 친구를 만난 양 변해버린 모습에 놀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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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림 맞추기라고 한다면, 내 삶의 모든 퍼즐은 ‘인사동’과 ‘귀천’이 들어가야 아귀가 맞아떨어진다. 인사동에서 세상을 배우고, 인사동에서 사랑을 하고, 인사동에서 아이를 만나고, 인사동에서 행복했고, 인사동에서 슬펐다.밀레니엄 이후 세계를 터벅거리며 떠돌다가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오니, 내가 알던 인사동은 갈 곳을 잃고 있었다. 인사동의 구심점은 뭐니 해도 ‘공간’이다. ‘귀천’ 같은 어른들이 계시던 낮의 공간! 그리고 밤이면 ‘불나방?’처럼 모여들던 정감 있는 허름한 주막이 그것인데, 인사동은 모든 것이 깔끔해졌다. 오가는 사람들은 많아지고 세계적 명소는 된 듯하지만, 그 안에 웅크리고 살던 속칭 ‘인사동 사람들’이 갈 곳은 없었다.
--- p.210
이제 우리들이 변했듯 인사동도 변했다. 낡았던 인사동은 젊은 옷으로 갈아입어 카페와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며 골목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엔 여전히 시와 그림과 조각들이 있고, 앞으로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들이 각자의 표정으로 새롭게 연출되며 인사동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은 우리들의 인생동(人生洞) 아닐까.
--- p.226
인사동에 가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도 들여다보고, 사지도 않을 한지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복 치마를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하는 등 눈이 호사를 누린다. 어디선가 이름을 부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려지고, 아는 얼굴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생각에 혼자 씨익 웃는다. 그러다 우연히 진짜로 마주치면 반가워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하면서 난리법석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괜스레 어슬렁거리고 싶은 인사동은 옛날과 달리 많이 변했다지만 그래도 그 거리, 그 골목, 그 추억은 잊을 수 없다.
--- p.251~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