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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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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는 모 님”얼마 전 리디북스에 발표된 전삼혜 작가의 단편 〈퍼펙트 페이스〉를 읽다가 웃음이 터진 적이 있어요. 소설은 이순신을 닮은 면접자가 소동을 부리고 간 후 ‘위인들의 얼굴 분석 딥러닝’을 통해 관상을 통해 직원을 채용하는 시스템을 마련하려는 회사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블랙코미디인데, 이런 대목이 등장했거든요. 성별 할당제랍시고 여성 위인을 많이 넣으라는 말 자체는 나도 동감하는 바였다. 어쨌거나 여성 위인도 많으니까. 단지 그 위인들의 사진과 이름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지. 천만다행으로 트위터에 한 이용자가 매일매일 그날 태어난 여성 위인에 대해 소개를 해놓은 아카이브를 찾게 되어 도움을 많이 받았다. 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는 모 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삼혜, 〈퍼펙트 페이스〉웃음의 포인트는 느닷없이 ‘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는 모 님’으로 소환된 분을 나 역시 알고 있다는 것이었고, 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그분은 벌써 몇 년째 그 일을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해오고 있다는 것이었죠. 그분이 그 일을 언제 어떻게 왜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까마귀 프로필 사진 밑에는 간략하게 소개글이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번역가, 과학소설가.’응? 누구지? 아마 그런 궁금함을 느낀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텐데, 무슨무슨 상을 오래전에 받으셨구나 하는 별 감동 없는 끄덕거림이 와, 하는 감탄으로 바뀌며 까마귀 프로필을 다시 보게 된 건 몇 해 전 〈과학동아〉에 수록된 단편 〈돌아간 사람들〉을 읽고 나서였을 거예요. 아니, 이건 (좋은 의미로) 최신 해외 SF 번역판인가, 하면서 다시 보니 한국 작가의 창작 SF가 맞았고, 그날로부터 그 작가의 이름이 제대로 뇌리에 새겨졌죠. 배지훈. 배. 지. 훈.작가의 번역작 역시 예전에 읽은 적이 있었더라고요. 알고 보니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한 작품을 옮긴 분이었고,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미래사 시리즈 중 〈코벤트리〉가 그의 번역작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기도 했죠. 그래, 이런 천재가 여기 한 명 더 있었구나, 하고요.창작과 번역을 겸하는 작가들이 국내외로 드물진 않지만, 지난 십수 년간 한국 SF에서는 김창규, 정소연 작가가 창작에서 누구보다 빛을 발하면서도 번역을 통해 해외 SF 명작들을 소개하는 데 힘써 온 것으로 유명하죠. 이수현, 고호관 작가처럼 번역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뤄왔으면서 창작에서도 가끔 혜성처럼 반짝이는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고요. 어느 한 가지만도 쉽지 않은 일을 둘 다 잘해내는 분들을 보면 그 능력치와는 별개로 SF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이겠구나, 싶어요. 그런데 작가의 천재성과 열정, 그리고 꾸준함이 있다고 해서 독자와 대중의 인정까지 쉽게 받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흔한 말로 때를 만나야죠. 김보영 작가가 어느 칼럼에서 썼듯이 정소연 작가가 개인 소설집을 내는 데 11년이 걸렸고, 김창규 작가는 한술 더 떠 12년이 걸렸어요. 그만큼 한국 SF 작가로 산다는 일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배지훈 작가가 2006년 제3회 과학기술창작문예 중편 부문에서 김보영, 김창규 작가의 뒤를 이어 당선된 후 본인 이름으로 된 단독 저서를 내게 되기까지는 15년의 시간이 필요했어요. 물론 앞서 말한 대로 그사이 번역도 했고 간간이 중단편을 발표해오긴 했지만, 사람들 눈에 배지훈 작가는 그간 몇 년간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매일 그날 태어난 여성 위인에 대해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까마귀 프로필 사진을 사용하는 모 님’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부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은 후 알게 되길 바랍니다. 아, 여기 또 하나의 전설이 귀환했구나, 한국 하드 SF의 계보를 이어가는 작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구나, 하고요.〈유니크〉 〈인탱글〉의 세계를 완성하는 《아마벨》의 탄생소설의 배경과 시작은 이렇습니다. 인간의 두뇌를 스캐닝해서 영원한 삶을 영유할 수 있는 시대, 그 시대가 시작된 지 백수십 년이 지나고 그 기술, ‘클리니컬 이모털리티’를 이용해 육체를 바꿔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된 지구.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바뀐 것은 별로 없습니다. 사이보그 형사 아마벨은 잔혹한 시위진압 현장에서 이모털리티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소년과 소녀를 구하게 되지만, 치료 도중 소년이 무참히 살해당합니다. 그 배후에는 스캐닝으로 컴퓨터 속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누리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아마벨과 소녀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요…. 배지훈 작가가 〈작가의 말〉에도 썼듯이 《아마벨: 영원의 그물》을 읽기 위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유니크〉나 〈인탱글〉을 먼저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야기들과 달리 ‘아마벨’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완성된 장편소설이니까요. 전작 중편들의 세계를 공유하면서도 장편소설로서 이 작품이 매력을 획득하고 또 다른 서사를 갖는 데는 주인공 아마벨의 공이 없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 서평은 주인공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그 소임을 다하고자 해요. 한국 하드 SF의 계보를 잇는다, 라고 거창하게 바로 앞에 쓰긴 했지만 (그리고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게 지금 또 뭐가 그리 중요한가요. 어쨌거나 91.9퍼센트 기계 몸을 가지고 있는 사이보그 형사인 아마벨은 구(舊) 러시아 출신의 형사예요. 몇 번의 크고 작은 전쟁 끝에 개별 국가는 사라지고 지구연방으로 통합되었지만, 지역적 색채가 아주 없진 않죠. 용병으로 2백 년 넘게 활동해 온 아마벨은 이제 수원 경찰서에서 근무를 해요. 소설에서 따로 설명은 없어서 아마도 고려인 출신이었지 않았을까 혼자 상상하면서 읽었지만, 수백 년이 지난 한국 사회는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더 세계화되었을 테니 왜 러시아 출신의 아마벨이 한국까지 왔을까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촌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게다가 이름은 또 왜 ‘아마벨’일까요. 이 역시 소설에 따로 설명이 있을 리 없고, 저자에게 따로 물어본 적도 없지만, 짐작키로 테헤란로 포스코센터빌딩 앞 조형물 ‘아마벨’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싶어요. 1997년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가 만든 조형물의 원제목은 ‘꽃이 피는 구조물’이었지만, 작품 제작 도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친구의 딸 이름 ‘아마벨’로 제목을 바꿨다고 해요. ‘진흙 속 연꽃처럼 고철로 만든 꽃 한 송이’ 라고요. 게다가 사고가 난 비행기 부품 일부를 작품 지료로 사용하기도 하고요.소설에서 두뇌 스캔 기술로 지구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영생을 살게 됐지만, 그 이전에 기계 몸으로 사이보그가 된 아마벨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아마벨은 그저 고철이 된 몸을 계속 고쳐가면서 살 수밖에 없는 몸이거든요.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91.9퍼센트 사이보그라고 해서 아마벨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마벨을 로봇 취급한다거나, 그래서 갈등을 겪는다거나 하진 않아요. 이미 그런 진도는 다 지나갔고, 중요한 건 무엇보다 생존이죠. 영생을 산다 해도, 온몸이 사이보그라 해도 생계의 문제에선 벗어날 수 없고요.출생부터 이름까지 독자로서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좋은 SF 작품들이 흔히 그러듯 캐릭터의 외양 묘사엔 그다지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데요(주인공의 성별에 대한 단서도 처음에 전혀 없어서 내용이 한참 진행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거든요), 이런 불친절이 독서를 방해하는가 하면, 실은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더 풍부한 상상을 하도록 이끌기도 해요. 몇 번의 생이고 다시 살 수 있고, 나노 기술로 어떤 외양이든 변경이 가능한 사회에서 외양 묘사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고요.아무튼 《아마벨: 영원의 그물》은 인간 지분이라고는 8.1퍼센트밖에 남지 않은 형사 아마벨이 우연히 휘말리게 된 사건을 겪으며 스스로의 인간성에 대해 많은 것들을 고찰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나는 박진감 터지는 밀리터리물”이라고 소개해도 손색없을 만큼 총성과 전투가 난무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이 다 해결된 듯한 순간에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반전까지 빼놓지 않고요.포스코사거리의 ‘아마벨’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사를 통해 보면 작품 설치 후 한동안 ‘아마벨’ 때문에 말이 많았었나 봐요. “고철 덩어리다” “흉물스럽다” “이해하기 어렵다” 등등요. 심지어 철거 논란까지 있었다니 사람들의 반감이 얼마나 대단했었나 싶네요. 그런데 그렇게 또 세월이 흐르고 얼마 전 나온 기사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흉물 논란 딛고 100억대 복덩이로”. 역시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요. 사실 장편소설 《아마벨: 영원의 그물》은 집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2006년 〈유니크〉 데뷔 이후 배지훈 작가가 이 소설을 쓰게 되기까지 15년간 절치부심한 시간들을 생각해봅니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린 만큼, 이 유니크한 소설이 독자 여러분께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한국 SF 장에서 배지훈의 이름을 다시 만나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르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한국 SF가 다양성을 통해 더 큰 전성기를 준비하는 지금이 바로 이 작가를 만날 가장 적절한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벨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작가의 말모든 이가 영원히 살면 정말 유토피아가 펼쳐질까?이 소설의 아이디어를 처음 어디서 얻었는지는 불행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이가 영원히 살면 정말 유토피아가 되나 보자”라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적어도 내 답은 “아니요”이다. 아서 C. 클라크는 소설 〈도시와 별〉에서 모든 이가 사실상 영원한 삶을 영유하는 완벽한 유토피아, 다이어스퍼를 묘사했다. 난 그런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완벽한 기술과 완전한 제도가 있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끔찍한 곳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결과가 이 글이다. 기술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항상 그래 왔고 아마 항상 그럴 것이다. 이 이외에도 《얼터드 카본》 같은 소수의 부자만이 영생을 누리는 사회를 생각해본 적도 있다. 그건 이미 이 작품의 전작인 중편 〈유니크〉에서 다뤘다.아직도 기억한다. 지하철 안,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듣고 있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른 그 순간, 퇴근길 피로까지 잠시 사라지고 반쯤 정지된 뇌가 갑자기 급발진하며 돌아간 그 순간을. 다급하게 수첩을 꺼내 아이디어를 적었다. 아이디어가 글로 완성되기까지는 1년 반이 넘게 걸렸다. 중간에 파생된 아이디어가 중대한 모순을 일으키는 바람에 완전히 갈아엎고 다시 쓰기도 했고 자잘하게 다시 쓴 것도 대충 대여섯 번은 됐었다. 우여곡절 끝에 중편소설 〈유니크〉가 완성되었고 제3회 과학기술창작문예에 당선되었다. 꼭 〈유니크〉를 읽어야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안 읽어도 되게끔 쓰도록 노력했다. 잘 됐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평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니까. (참고로 〈도시와 별〉에서 오로지 주인공만 전생이 없는 자라 하여 ‘유니크’라고 부르는데 이건 순전히 우연에 불과하다. 아무 관련이 없고 잠재의식이 작용한 것도 아니다.)비평하니까 내가 받은 첫 악평이 생각난다. 글은 고등학교 때부터 썼지만 친구가 아닌 생판 남에게 글을 보여준 건 대학에 들어간 직후였다. 아주 짧은 초단편이었는데 끔찍하도록 유치한 글이었다. 문장은 줄거리보다 더 처참했고 엔딩은 눈뜨고 못 봐줄 정도였으며 남에게 보여줄 용기가 가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만약 지금의 내가 그 글을 남이 쓴 거라 생각하고 비평한다면, 가망이 없으니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글에 비평을 해주신 분이 계셨다. 물론 악평이었지만 정중했고 정성스러운 악평이었다. 아마 내가 그 글에 들인 노력보다 그분이 비평에 들인 노력이 더 무거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고 다음에는 저거보다는 더 잘 써보자고 결심했다, 아니 더 정성스럽게 써보자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잘 쓰기는 사실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걷다 보니 조금 긴 길을 돌아오긴 했어도 결국 내 이름이 걸린 책을 내게 되었다. 그분과 그분을 포함하여 나에게 술과 음식과 말로 칭찬과 격려를 보내주신 모든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글을 내주신 아작과 여기저기 부서진 문장을 두들겨 맞춰주신 편집자님께도 감사드린다.또 주기적으로 격려를 대량으로 공급해준 친구이자 비평가이자 팬인 고양시 사는 어떤 분에게 정말 깊고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당신 덕분에 이 소설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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