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떠나온 세계 <인지 공간>
이 단편은 젊은 작가상 단편 소설집에서 한 번 접한 적이 있는 소설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에 수록된 글인가 했으나 아니었고 이미 읽은 적 있는 글이었기에 나는 한 챕터를 잃은 것 마냥 속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시 읽은 인지 공간은 나에게 새롭게 생각할 거리들을 남겨 주었다
이래서 좋은 글과 영화와 음악은 두 번 세 번 향유 해야 하는 거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지 공간의 주인공은 두 명의 아이, 두 명의 소녀, 두 명의 방황한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다
제나와 이브
제나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무서울 게 없는 21세기 형 인기 인플루언서 집안이 빵빵한 부족할 것 없는 공주님 스타일
이브는 타고나기를 연약하고 약하게 태어나서 주변의 무시를 받지만 그 와중에 자기 확신이 강해 똑똑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가며 공상을 즐기는 듯 하지만 학자 다운 면이 있는 애늙은이 스타일
정도라고 웹소설 스럽게 정리할 수 있다
나의 표현력이 겨우 이 정도 수준이라는 것이 아쉽지만 보다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 설명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삼는다
둘은 절친이였으나 시간이 갈 수록 보내는 시간도 함께 공유하는 공간도 추구하는 가치도 달라져만 간다 흔하게 겪는 인간관계의 권태기가 아닐까
권태기는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극복하지 못할 서로간의 차이는 그저 그대로 두고 해결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글은 떠나간 이브와 후회하는 제나와 깨달음을 얻고 친구를 그리워하는 제나를 그렸다
만약 이브가 인지 공간을 벗어나지 않았다면 실종되지 않았다면 시신이 발견되어 탐사대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스피어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나는 이브를 믿어 주었을까
죽음이라는 강력한 계기가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권태기를 극복하고 꾸준한 우정과 사랑을 유지할 힘이 있을까
비관적이지 않은 결말을 그려준 인지 공간이란 글을 읽으면 나는 3번째 달을 보았고 희망을 보았다
<인상 깊었던 구절>
- 거대한 격자 구조물은 멀찍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아마도 신이 저 구조물을 설계한 것이라고 공동체의 어른들은 말했다
- 나는 대체로 공동 지식을 열띠게 옹호하는 쪽이었지만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하면 격자 구조물에 대한 이브의 감정이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른들이 이브를 과보호 하는 건 인지 공간의 격자 구조물 때문이기도 했다. 이브가 지금처럼 약한 몸으로 어른이 되면 격자물에 진입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자정된 위험 때문에 지금까지 이브는 너무 많은 기회를 빼앗겨왔다.
- 그러나 열두 살부터 이브와 나의 세계는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열두 살이 되자 아이들은 신체의 발달 정도를 측정하고 간단한 운동 기능을 검사하는 검진을 받았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해진 신체 기준을 통과했는데 오직 이브만이 기준 미달이었다. 이브는 여전히 터무니없이 작았다
- 그날 밤 이브와 내기를 했다. 저 격자 속에 얼마나 많은 별을 담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밤하늘의 모든 별을 격자 속에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브는 격자가 담을 수 있는 지식의 양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감정적인 감정적인 논쟁이었지만 우리는 곧 진지해졌다.
- 하지만 얼마 뒤 인지 공간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브와의 논쟁이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를 깨달았다. 이브는 격자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지만 내가 직접 목격한 인지 공간은 그렇지 않았다. 격자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세계 전체였다.
- 이건 정말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야. 우리의 집단 기억이 쇠퇴하고 있다는 걸 알아? 이브의 표정은 확신에 차 있었지만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별로 놀라울 것도 없어. 공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하니까 불필요한 기억은 제거될 수밖에. 아니 그냥 불필요한 기억이 아니었어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니까. 우리가 간직해온 이야기가. 공원 조명 아래에서 이브가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은 나에게 무언가를 호소하는 것 같았다. 이브가 밤하늘을 가리켰다. 세 번째 달 말이야.
- 이브의 알은 옳기도 했고 틀리기도 했다. 인지 공간에는 여전히 세 번째 달에 대한 격자 정보가 남아 있다. 그런 동시에 공동체는 세 번째 달을 잊어가고 있다. 인지 공간에 머무를 때 사람들의 기억은 공동체의 평균값으로 수렴된다.
- 한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떠나온 세계이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모래와 같은 별들이 있었다. 그때 나를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이 모래처럼 흘러내렸고 비로소 나의 오랜 친구를 이해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저 밤하늘에는 별이 너무 많아서 우리의 인지 공간은 저 별들을 모두 담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저 별들을 나누어 담는다면 총체적인 우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침내 이 행성 바깥의 우주를 온전히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 그곳을 향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