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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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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큰글자도서)
[도서] 로렘 입숨의 책 (큰글자도서)
구병모 저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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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큰글자도서)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1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294g | 128*188*20mm
ISBN13 9791192638072
ISBN10 1192638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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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구병모의 소설을 읽을 권리] 어떤 분량으로도 자신의 색을 가지고 소설을 써낼 수 있는 작가, 구병모. 구병모가 가진 날카로운 메시지와 심미적인 색채를 미니픽션 13편으로 표현해냈다. 현실보다 더 예리한 환상은 물론, 소설과 세계에 관한 고찰 과정을 섬세한 스케치들을 보듯 다양하게 엿볼 수 있는 소설집. - 소설/시 MD 김유리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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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은 제 어깨의 날개에서 깃을 하나 뽑았다. 그 팽팽하고 두꺼운 깃으로, 대지에 힘을 주어 돌바닥을 천천히 긁어내기 시작했다. 신인에게는 영원이라는 시간이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조금도 서두를 것 없었다.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여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마디와 소절이 남은 음악과도 같은 리듬으로, 특별한 기교 없이 붓을 대었으나 우연히 만난 점과 선에서 경이를 포착한 화가와도 같은 몸짓으로. 신인이 그어 나가기 시작한 선은 언뜻 보기엔 무정형으로 뻗어나갔다.
---「신인神人의 유배」중에서

어쩌면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있는 힘을 다해 무의미해지는 것이었다. 그 자신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작가가 제각기 싸지르거나 게워낸 모든 글은 로렘 입숨의 무한 변주 반복에 불과할지도 몰랐고,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무거나 쓰는 것과 다를 바 없어졌으며, 그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비로소 그 무엇도 쓰지 않음?세상에 어떤 글도 존재하지 않음이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궁극의 글쓰기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정적보다 완벽한 음악이 없듯이, 점 하나 찍지 않은 흰 도화지가 화려한 그림을 압도하듯이, 태어나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삶이듯이.
---「동사를 가질 권리」중에서

너는 이제 그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달아나도 좋다. 아니 달아나야만 한다. 달리는 발에 한계가 있으니 부디 날아갔으면 좋겠는데, 신의 보살핌이 없이는 너나 나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 우리는 모두 유한하고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한 개체.
---「날아라, 오딘」중에서

쥐라는 생물이 멸종을 한 게 아니니 당연히 어딘가에 많이들 살고 있을 테고, 사람의 문화와 문명이 그것을 이부자리나 식탁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최소한 사람들의 눈에 덜 띄게끔 관리했을 뿐이었다. 선량한 시민의 삶을 위협하지 않도록, 그것들이 없는 척, 그것들이 살아 있다는 걸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관리 실패였다. 아기를 키우는 집에 쥐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재건축에 대한 기대감 상승으로 인해 집주인은 다음번에 전세금을 대폭 올릴 예정이었고, 그녀의 남편은 지금까지 이상으로 대출을 받을 조건이 되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었다.
---「궁서와 하멜른의 남자」중에서

그 애는 어른이 되면 두 팔을 벌리고 선나무가 될지도 몰랐다. 깜박 졸던 신의 실수로 식물의 유전자를 가진 무언가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처럼. 두 팔로 나무 그늘을 만들어주고, 머잖아 그것이 하늘까지 뻗어 올라갈지도.
---「롱슬리브」중에서

말을 가진다는 것은 신이 된다는 뜻이다. 말을 남용하다 보면 자신이 언젠가는 그 말을 가졌다고 착각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신이 될 날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르고 실은 이미 저마다 신을 참칭하며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말을 없애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불의와 불편을 덜어내기도 할뿐더러 그들을 궁극적으로 신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원은 실패가 이어진 데 대해 조금도 낙담하지 않고 다음 도시로 나아간다. 세계는 넓고 도시는 많다. 어쩌면 신의 사전에 등재된 말들을 모두 지울 때까지 이 세계의 도시는 남아 있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말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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