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을 겪고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이 국가의 식민주의에 처절히 패배하면서도, 낙담의 바닥에서 목소리를 쥐어짜내 차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희망을 사회 다수자에게 끊임없이 전해온 이들. 그 투쟁의 궤적을 되돌아보면서, 내 마음도 다시 크게 요동침을 느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기를 얻게 된 것은 그들이 어떤 [승리에 대한 명확한]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투쟁을 결행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투쟁했기 때문에 비로소 ‘전망’이 열린 것이었다.
---「15쪽, 〈머리말〉」중에서
도쿄대에 유학하고 있던 베트남인이 나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데, 도쿄대생들은 프랑스어로 말을 걸어온다는 얘길 했습니다. 도쿄대생들이 그를 어학의 연습 상대로 삼은 것입니다. “왜 우리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는지,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 그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나요? 도쿄대는 일본의 일류 엘리트들이 배우는 곳이죠? 다나카 씨, 일본의 장래는 위험하네요.” 그리고 또 생각나는 것은 「아카하타」에 실린 ‘프랑스어 강좌’ 광고(1973년 10월 31일 자)를 가져왔던 일입니다. 캐치프레이즈는 “인도차이나 3국에 보급되어 있는 프랑스어를 배워, 인도차이나 인민과 우호를”이었습니다. 아직 신문 1면에 베트남의 전황이 보도되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도 같은 광고가 나왔습니다. [일본공산당원들인] 독자도, 당 간부도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죠. 유학생이 “다나카 씨, 일본의 좌익도 추락할 데까지 추락했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공산당 욕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주간신초週刊新潮」 같은 데서 “공산당, 땅에 떨어지다!”라는 비판 기사를 쓰면 좋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좌도 우도 화제로 올리지도 않는 이 뿌리 깊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32~33쪽, 1장 〈‘원점’이 된 ‘아시아문화회관’〉」중에서
아시다시피 일본 정부는 그 이후, 재한 피폭자가 일본을 방문해 치료받을 수 있게 합니다. 일본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일본에 와서 원폭병원에 입원하면 무상으로 치료받을 수 있고, 그 사이에 건강관리수당도 나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나 귀국하면 건강관리수당은 나오지 않게 됩니다. 일본 땅을 떠나면 피폭자 건강수첩의 효력이 없어진다는 게 정부의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법률을 통해 취한 조처가 아닙니다. 1974년에 나온 이른바 ‘402호 통달’입니다. 그 문제로 다시 재판을 해 그 통달 자체가 위법이라는 형태로 뒤집혀서 지금은 이미 폐지되었습니다. 이 또한 재한 피폭자의 법정 투쟁이 [문제 해결의] 돌파구가 됐지만, 이를 통해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은 일본인도 많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이른바 ‘재한 피폭자 문제’라고 말했었지만, 그 뒤에는 ‘재외 피폭자 문제’로 확장되었으니까요. 피폭자 중에는 전후 미국이나 브라질로 이주한 이들도 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병에 걸리기도 했다고 해요. 나카지마 다쓰미 씨에게 듣고 매우 인상에 남았던 얘기는 피폭자에게는 금이 생겨버린 그릇 같은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깨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작은 일이 생기거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장애가 드러나게 된다고요. 정말 그렇겠구나, 생각했습니다.
---「52~53쪽, 2장 〈한국인 피폭자, 손진두의 넋〉」중에서
1910년 병합 이후에 태어난 것이죠. 그래서 편지를 읽어보니 취지는 이렇습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일본인이었는데 내게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내 국적을 없애더니, 어느 날 갑자기 외국인으로 만든 뒤 이러쿵저러쿵하고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1947년에 일본으로 돌아왔으니, 전후에 입국한 셈입니다. 그러니 이른바 옛 식민지 출신자들에게 부여되는 재류 자격도 인정받지 못하고, 일반 외국인과 똑같이 정기적으로 재류 기간을 갱신하지 않으면 재류 자격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다지 살기 좋은 곳이 아닐지 모르지만 부디 와 주십시오’ 정도의 인사는 있어야 할 텐데, 비자를 연장한다는 둥 연장하지 않는다는 둥 지문을 찍으라는 둥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들어야 한다니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국을 상대로 내 일본 국적을 확인하는 소송을 하고 있다. 그러하니 여러 가지로 협력해줬으면 좋겠다”라고요. 놀랐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얘기와 논리였기 때문이죠. 식민지 지배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삼고, 말과 이름도 빼앗고, 마지막에는 전쟁에까지 끌어냈으면서, 전후에는 표변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것과 동시에 일본 국적을 상실시켰습니다. 일본의 국적법에는 본인의 의사 확인 없이 국적을 없앤다는 내용은 없는데도 국적 선택권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이니치 조선인은 지금도 일본 국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송 씨의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성립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만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60~61쪽, 3장 〈‘국적’이라는 차별 장치〉」중에서
나는 박 씨와는 그다지 얘기해본 적이 없지만, 그는 1951년생입니다. 김경득 씨(일본의 외국 국적 변호사 제1호)는 1949년에 태어났죠(2005년 사망). 양쪽 모두 1952년의 ‘일본 국적’ 박탈 이전에 태어났습니다. 일본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공부했는데,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게 되니 [자이니치에 대한] 차별이란 현실과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무엇인가, [일본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단 말인가, 이런 사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런 세대적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경득 씨 이전에도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자이니치가 12명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귀화’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그가 [귀화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렀다는 것도 세대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향균 씨(국적 조항에 의해 관리직 수험을 치지 못하게 한 문제를 소송을 통해 추궁했다)도 1950년에 태어났습니다(2019년 사망).
---「73쪽, 4장 〈‘히타치’에서 ‘민투련’으로〉」중에서
1976년 10월입니다. 아시아학생문화협회에서 아이치현립대로 옮기고 몇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전 직장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줘난성卓南生이라는 싱가포르 유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내 친구 중에 김용권金容權(저작가·번역가, 1947~ )이란 자이니치가 있다. 그 사람의 후배가 이번에 고생을 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는데 ‘귀화’하지 않으면 변호사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 후배는 변호사는 자유업이니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다. [자이니치의 신분을 유지한 채로] 변호사가 되어 다음 세대를 위해 길을 개척하고 싶다고 하는데, 이래저래 힘든 것 같다. 그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겠나?” 하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만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91쪽, 5장 〈‘헌법 파수꾼’의 인권 감각을 쏘다〉」중에서
그러니까 정말로 엉망진창입니다. 법치국가가 아닌 것이지요. “말이 안 되지 않느냐”고 지적하니까 “아, 미안합니다”라고 하는 것 같지요.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법연수소 입소를] 한정한다고 처음에 결정한 것을 뒤집는 터무니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법의 지배’고 나발이고 없는 것입니다. 최고재판소가 자기들 좋을 대로 한 거죠. 그런 사람들이 ‘헌법 파수꾼’이라며 재판소의 제일 높은 곳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니 무서운 일이죠. 이 나라가 법의 지배나 법치주의라는 것에서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국적을 실마리 삼아 보게 되면, 완전히 너덜너덜한 그런 것들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 중에 가장 으뜸가는 예가 최고재판소가 보여준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116쪽, 6장 〈자이니치 한국인 변호사 제1호, 김경득이 남긴 것들〉」중에서
한 씨와 몇 번인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중에 지금도 기억하는 얘기는요. “우리는 대단한 것을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남겨줄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손가락을 까맣게 해서 지문을 채취당하는 것, 이것 정도는 이제 좀 없애고 싶다. 이런 것을 더는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시키고 싶지 않다…”라고요. 그래서 한 씨는 결심을 하고 도쿄 신주쿠 구청에서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할 때 지문날인을 거부했습니다. 1980년 9월의 일이었습니다. 지문을 찍지 않으면 새 외국인 등록증을 교부받을 수 없고, 그러면 등록증을 미소지하게 되어 자칫하면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히고, 최악의 경우엔 오무라 수용소에 보내져 한국으로 강제 송환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 들을 생각하니] 불안했지만 그래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131~132쪽, 7장 〈지문날인 거부: 일본의 공민권 운동〉」중에서
일본인과 외국인을 나누는 발상은 지문날인제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테러 대책이라는 게 앞에 내세운 명분이지만, 일본인에겐 테러리스트가 없고 외국인에겐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옴진리교 등은 뭡니까. 굳이 말하자면 특별영주권자는 제외했지만요. 그렇게 되면 쉬취전 씨 같은 중국인 일반영주자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자이니치와 같은데, ‘왜 나만?’이라는 식으로요. 영주권자는 입국관리국이 정기적으로 재류 상황을 심사할 필요가 없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정기적으로 입국관리국에 출두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특별영주와 나누는 것은 이상한 일이죠. 지문날인도 먼저 ‘특별영주’와 ‘일반영주’는 동시에 폐지했습니다. 더 ‘국민에 가까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요. 그리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일정 조건을 만들어 ‘일반영주’를 ‘특별영주’에 통합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10년이나 20년 동안 ‘일반영주’한 이들은 자동으로 ‘특별영주’로 인정한다든가 해서요. 일본의 국적법이 속지주의가 아니라 혈통주의를 취하고 있는 이상 이런 궁리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처우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최근엔 전혀 기능하지 않고 있습니다.
---「165쪽, 8장 〈지문날인 거부 2〉」중에서
이렇게 이례적인 전쟁 희생자 원호체제가 만들어진 것은 앞서 말한 가야 오키노리 시대였습니다. 당시부터 나오는 말이었지만 ‘금전적 급부’와 ‘정신적 위로’는 차의 두 바퀴입니다. 금전 면으로는 이제 대체로 충분히 보상을 했으니, ‘정신적 위로’라는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구체적으로는 ‘야스쿠니’입니다. 전전에는 야스쿠니에 신으로 모셔졌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집에 가면 ‘유족의 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어서 모두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국가를 위해서 아드님이 희생을 했다고 말이죠.
이 지점에서 ‘야스쿠니신사 국가 호지護持’[야스쿠니신사를 국가가 보호하고 지켜가라는 의미]라는 게 부상합니다. 야스쿠니신사 법안이 제출되지만, 어떻게 해도 헌법 제20조 정교분리8와 관계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우익 쪽에서 ‘자, 그러면 공식 참배를 하라’며 소란을 일으켜, 이번에는 총리대신의 야스쿠니 공식 참배가 쟁점화됩니다.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씨(재임 기간 1974~1976)가 1975년에 ‘사적 참배’를 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씨(재임 기간 1982~1987)가 1985년에 ‘공식 참배’까지 밀고 갑니다. 총리대신이 야스쿠니신사에 가느냐 마느냐는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제가 되어 오래도록 영향이 남아 있잖습니까. 지금 말한 흐름과 전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후의 중요한 문제란 것은 자이니치 처우를 둘러싼 쟁점으로 부터 보면, 정말로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일본의 전후, 평화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들의 속이 텅 빈 모습이 떡하니 드러난다 할 수 있습니다.
---「181~182쪽, 9장 〈‘잊혀진 황군’들의 절규〉」중에서
나는 얘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법률을 심의할 때엔 부디 당사자의 의견을 들어달라고 말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박해받은 일본계 미국인의 보상법을 만들 때 각지에서 공청회를 열었다. 당사자인 일본계 미국인들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기 생각을 밝힐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꼭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고 하니까 [당사자가 아닌] 내가 발언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의견조차 말할 수 없었던 강 씨를 생각하면, 참 복잡한 마음이었습니다.
---「196쪽, 10장 〈전후 보상 재판에서 조위금법으로〉」중에서
미에현에서 ‘자이니치’가 교원 채용에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왔었죠. 그래서 물어보니, 아이치현과 나고야시에서는 시험조차 볼 수 없다는 겁니다. 당시 나는 아이치현립대에 있었습니다. 대학에 현의 교육위원회와 얘기가 통하는 선생님이 있어서 그 사람에게 물어보니, 전에도 우리 대학에 교원을 희망하는 자이니치 학생이 있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교육위원회에 교섭을 해보았지만 퇴짜맞은 적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미에현에서는 괜찮은데 [바로 옆에 있는] 아이치현에서는 안 된다니 이상하지 않느냐는 문제 제기가 이뤄졌습니다. 앞서 말한 민투련 운동이 점점 확산되는 시기였잖아요. 차별이 이뤄지는 것들을 일람표로 작성해서 ‘다음엔 이것이다’라면서 부숴가는 시대였습니다. “우리도 아이치에서 운동을 통해 길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게 아니냐”라고 했지요.
---「209~210쪽, 11장 〈‘당연한 법리’란 무엇인가〉」중에서
모처럼이니 사람을 나눠서 한국의 국회의원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나는 민주노동당이라는 최좌익 정당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의원이 다섯 명 정도였던가요. 그래서 “꼭 한국에서도 지방 참정권을 허용해달라”고 얘기했더니, 그 젊은 의원이 “이 나라는 오랫동안 화교를 엄청나게 차별하고 냉대해왔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확립하려면 외국인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방 참정권의 개방은 하나의 상징적인 정책이니까 꼭 실현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에~[대단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240쪽, 12장 〈외국인 참정권이라는 ‘출발점’〉」중에서
조선학교 부수기에 열심인 사람들은 공화국과 연관성을 특히 끄집어내 ‘사상 교육’이나 ‘반일 교육’을 문제 삼으면서 여러 말을 합니다. 그 인식 자체가 엉망진창인 것은 접어두고, 애초에 논리적으로 볼 때 그들의 눈엔 교육에 있어 국가와 민족, 정체성의 형성이란 문제와 관련해 국가나 민족이 갖는 중요한 역할이 안 보이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히 [자이니치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마이너리티로서 소외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편견]를 튕겨낼 수 있는 용수철로서 그런 것들이 [아이들의 정체성 형성 등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조선인이라는 게 나쁜 거야?”라는 아이의 물음에 [부모와 주변 어른들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공화국과의 관계’나 ‘수령님 운운’하면서 [조선학교를 겨냥해] 소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알지 못합니다. 조선학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내는 기관지 같은 것을 보면 조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조선학교를 비판하는 글도 실려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조선학교가] 괘씸하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조선학교 시절이 자신에게 있어 매우 귀중했다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방금 말한 것과 관계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63~264쪽, 13장 〈조선학교의 대학수험 자격 문제〉」중에서
키워드는 ‘원상회복주의’입니다. 옛 식민지 출신자의 일본 국적을 박탈할 때 일본 정부의 논리는 “만약 일한병합이 없었다면 조선인이었을 사람은 조선인으로 취급한다”였습니다. 그렇다면 언어를 빼앗긴 상태를 원래대로 돌이키는 것도 ‘원상회복 의무’입니다. 거기서부터 에다가와 조선학교의 보호, 나아가 ‘민족 교육의 보장’이라는 논리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그 의견서의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때까지 명확히 쓴 적이 없었지만, 이 사건과 만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죠. 하나하나 개별적 사건 가운데에서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생각해내는 것이 내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279쪽, 14장 〈‘시작’으로서의 에다가와 조선학교 재판〉」중에서
어쩐지 북한과 얽히면, 또 ‘납치’라고 하면 나가타초[국회]에서도 가스미가세키[정부]에서도 무조건 ‘사고 정지’가 일어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요. 그렇지만 아이들의 교육에 관계되는 문제, 자라나는 차세대의 문제잖아요. 왜 일부의 반발을 어떻게든 해서 극복하지 못하는지. 왜죠? 이것을 실현하면 후세에 남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교육이니까 다음, 그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나는 민주당 정권이니까 다소 어수선하더라도 [조선학교의 고교무상화 적용이] 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배울 권리는 당연한 도리입니다. 왜 이게 안 되는지, 어느 지점에서 걸리는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93쪽, 15장 〈21세기의 4·24, 고교무상화 배제와의 싸움〉」중에서
일본을 두고 배외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고 말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식민지가 갖고 싶지만 이민족을 끌어안으면 자신들의 단일성, 민족성이 무너진다. 그래서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식민지 지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됩니다. 그렇지만 식민 지배에 나서 이민족을 지배한 이상,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을 어떤 모양으로 역사 안에서 소화해갈 것인가 하는 과제가 생겨납니다. 문자 그대로 ‘불가역변화’[한번 이뤄지면 되돌릴 수 없는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전후에 “이제 식민지는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식민지정책론’이란 강좌명을 ‘국제경제론’이라고 고쳤습니다. 하지만 식민지가 사라졌어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부정적인 역사’를 어떻게 긍정적인 것으로 변화시킬까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또 예전에 이민족을 지배했던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할 때, 조선학교는 가장 중요한 존재이고 일본 사회에 귀중한 자산입니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조선학교는 솔직히 말해 자이니치들에게 보물이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에도 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322쪽, 16장 〈무상화 재판의 새 단계: 종축을 통해 본다는 것〉」중에서
지금도 수많은 자이니치가 일본 사회 내에서 크고 작은 차별과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들이 택한 것은 차별과 편견에 분노와 증오로 맞서는 폭력의 길이 아니었다. 민족적 자긍심을 지키면서도 일본 사회 속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평범하고 안온하게 살려는 ‘공생’의 길이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공생은 더불어 살아가자는 의미다.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가 공생을 위해 투쟁해온 자이니치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결국 공생할 수밖에 없는 이웃인 일본 사회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우린 상대를 끈질기게 응시하고 대화해, 마침내 공생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376쪽, 〈역자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