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선 하얀 가로등을 하나씩 지나치며 유토는 인적 없는 길을 달렸다. 고요한 주택가의 밤 아홉 시. 이따금 귀가 중인 회사원으로 보이는 사람을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운동복 차림으로 달리는 유토를 수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속에서 들끓는 분노인지 초조함인지 모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유토는 달렸다. 달릴 때면, 늘 유토 곁을 맴도는 불쾌한 마음도 사라졌다. 이 순간만큼은 다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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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는 속도를 조금 늦추고, 안을 살피듯이 고개를 돌려 공원 쪽을 바라봤다. 당연히 사람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공원 입구를 지나치고 나서 뭔가 위화감을 느낀 유토는 발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발길을 되돌려, 다시 한번 입구로 가서 공원 안으로 몇 발짝 걸어 들어갔다.
유토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유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앉아 있는 사람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소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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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한 달 반 정도 전, 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의 일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엄마가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유토도 나오토랑 같은 고등학교 갈 거지?”
같은 고등학교라는 건 현 내 최상위권인 현립 다이이치 고등학교를 뜻했다. 모의고사 성적은 아슬아슬하게 합격 문턱에 걸린 수준이었지만, 노력하면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다. 유토는 형을 힐끔 본 다음 조용히 말했다.
“난 히가시 고등학교에 갈 생각이야. 집에서도 가깝고.”
그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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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자신에게 아무 기대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엄마의 사랑과 열의 또한 형이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은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단지, 그때까지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었던 사실을 직면하게 됐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집은 늘 나오토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모든 일은 나오토가 우선이었다. 휴일에 놀러 갈 장소, 가족이 다 함께 보러 갈 영화, 식탁에 올라오는 좋아하는 음식. 자신은 동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유토가 나오토의 물건을 물려받는 일은 흔해도 그 반대는 없었다. 그래서 유토는 오랫동안 자신의 바람을 형의 바람에 동화시키려고 해 왔다. 형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형이 관심 가지는 스포츠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형을 뒤따르는 동생을 연기했다. 그렇게 하면 무엇보다 형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고, 겉으로나마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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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가 달리기를 재개한 건 나흘 뒤였다. 사카와 공원에 도착했을 때 아카네는 이미 와 있었다. 처음 아카네를 봤던, 바로 그 그네 위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발소리에 아카네가 얼굴을 들었다. 유토가 다가오는 걸 눈치챘는지 그네에서 튕기듯이 일어섰다.
“오랜만이야.”
유토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웃자, 일순 아카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안 오는 줄 알았어.”
“지난번에 온 비 때문에 감기에 걸렸었어.”
“…이제 괜찮아?”
“건강한 게 내 유일한 장점이야.”
유토가 걷기 시작하자 아카네는 아무 말 없이 옆에 나란히 섰다.
“너희 집 사정, 제대로 듣고 싶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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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왜?”
“아카네를 좋아하니까.”
좋아한다고 입 밖으로 꺼낸 순간 몸이 확 뜨거워졌다.
“좋아한다고?”
“내가 싫어?”
그럴 리 없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함께 밤거리를 걸었다. 분명 서로 마음은 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카네는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안.”
“…미안하다고?”
아카네는 유토의 반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걷기 시작했다. 유토도 아카네의 걸음에 맞추어 옆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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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힘든데,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거짓말까지 해야 했던 아카네를 생각하니 공연히 화가 났다. 하지만 누구에게 화를 내면 좋단 말인가. 어디에도 답은 없었다.
“미안. 이야기 들어주지 못해서.”
“유토의 탓이 아닌걸.”
“노도카는 괜찮았어?”
“…여러모로 불안한가 봐. 그 애는 엄마의 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자기도 학교에 안 간다고 떼쓰는데… 어떻게든 보냈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도 초조하니까 화풀이하게 돼. 아직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애한테…. 그런 나 자신이 싫어. 정말 너무 싫어.”
아카네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토는 다시 아카네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거듭 속삭였다.
“나는 좋아해. 아카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좋아. 정말로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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