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외로움, 고독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잖아요. 좀 낡은 표현이지만 지구촌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얼마나 신선했나 요. 언제라도 전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볼 수 있고, 원한다면 당장에 비행기를 타고 그곳으로 떠날 수도 있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다, 참 멋진 일이죠. 하지만 문명이 발달하고 타인의 세계가 가까워진 것이 자명한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외로움이나 고독이란 것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 느낌이었어요. 오히려 전 세계 사람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뒤에 숨어 각자의 고독을 더 짙게 만드는 것만 같았죠. 실제 자신은 더욱 꼭꼭 숨긴 채 말이죠.
소통의 부재. 네, 저는 고독의 근본 원인을 그것으로 전제하고 이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아마 우리는 과거보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 더 혼자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프롤로그」중에서
인간은 본디 연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어디 세상 살이는 만만하던가요? 아니요. 언제든 우리를 할퀴고 물어뜯을 태세를 하고 있죠. 그런 날카로운 세상에 상처 입은 나약한 영혼들이,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숨어 있는 것을 익숙하고 편하게 생각했던 이들이, 익명이라는 하나의 보호구를 착용하고 처음엔 대화방에서, 이후엔 오프라인에서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조금씩 달라져 가며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함께 공감해주시길 바랍니다.
---「프롤로그」중에서
# C의 기록 1 _ 오피스텔 내 헬스장
아, 본론 얘기를 해야겠죠? 피디님이 몇 가지 질문지를 주고 가긴 하셨는데, 집에 놓고 와서요. 그냥 기억나는 대로 답해본다면 외로운 건 뭐 매일 외로워요. 예전엔 아닌 척하는 게 더 세 보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불필요한 거더라고요. 인간은 누구나 다외로운 거 아니겠어요? 저는 그래서 그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잊어보고자 매일같이 뛰고 있네요. 하하.
---「1 혼자인 사람들」중에서
# A의 기록 4 _ 화장실
“안녕하세요. 여기 조명이 참 좋죠? 네, 이곳은 화장실입니다. 이쪽 화장실은 좀 후미진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잘 오질 않아요. 그래서 혼자 있고 싶다거나 프사를 예쁘게 찍고 싶을 때 이곳을 찾곤 합니다. 어제 다큐에 참여한 사람들과의 단톡방이 열렸어요. 예전에야 이웃사촌이니 한 동네 사람이니, 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요즘은 거의 없잖아요. 필요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 해주기보다는 그냥 나한테 피해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훨씬 더 큰 것 같아 요. 저도 물론 그런 사람이고요. 그런데 이 단톡방은 좀 뭐랄까, 느낌이 달랐어요. 사실 대단한 얘기를 나눈 것도 아니고 생존 신고나 하자, 뭐 이런 취지였는데, 다들 혼자인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 아니요. 그보다는, 이제 알겠어요. 나만 이상한 거 아니구나, 다들 나랑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그런 안도감이 든 것 같아요. 어떤 이유로든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는 남과 다르다는 게 스스로 취약점이 되기도 하거든요. 인간이 참 나약하죠? 뭐 남들과 좀 다르면 어떻고,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크게 잘못하는 게 없다면 그저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 거잖아요?
사실 이건 제가 저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예요. 30년 넘은 모범생. 그게 바로 저니까요. 어떤 일이 제게 일어났고, 그 일 때문에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하나 깨닫게 된 게 있어요. 내가 참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았구나. 이렇게 살지 않았어도 됐구나. 그리고 막 억울한 거예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왔지? 죽는 순간에 후회는 안 남을까? 이제라도 좀 막살아볼까? 하하. 한 가지 고백하자면 제가 음식을 잘 소화를 못 시켜요. 몸은 알고 있는 거죠. 제 마음이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요. 오늘은 일부러 죽을 먹었는데도 토했어요. 위내시경까지 해봤는데 아무 문제가 없대 요. 아무래도 마음의 병인 거겠죠. 얼마 전까지는 굉장히 조급했어요. 이런 나를 어떻게 해야 하나. 빨리 나아야 하는데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아, 나는 그 일이 있기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겠구나. 나는 이제 그 일을 겪은 사람이 된 거구나. 이젠 이런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주는 수밖에 없겠구나. 왜 눈물이 나려고 하죠? 저도 참 주책이네요. 카메라 앞에서 혼자 주절주절. 어쨌든 천천히 저는 나아질 거예요.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었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기회인 거겠죠? 이 방송이 나가고 나면 저 같은 경험, 아니 저보다 더한 일을 겪은 사람들도 다들 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오늘 제 브이로그는 여기까지입니다.
---「1 혼자인 사람들」중에서
밤공기에는 마법의 묘약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모두의 얼굴은 흥분과 열기로 상기되었고, 이를 나무라는 듯 서늘한 바람이 한차례 지나갔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들에겐 좀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어디로든 가도 좋아. 오늘 밤만은 모든 걸 허락할게.” 그것은 감미로운 속삭임이었다.
“와, B님은 혼자 사는데 이런 RV를 타세요?” C가 감탄했다.
“아, 3년 전쯤에 샀는데, 그땐 이렇게 혼자일 줄 몰랐던 거죠.
캠핑 좋아하거든요. 아무래도 짐이 많으니까….”
B는 적절한 단어를 고르려는 듯 망설이다가, 서둘러 말을 끊었다.
“제 얘긴 재미없으니까 그만하죠.”
(…) 그때 B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진짜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것도 심야에 즉흥 여행이라니. 평소 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인데.”
“그러게요. 흔한 일은 아니죠. 사람이 살면서 이런 일을 겪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여기 혹시…” A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범죄자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A는 말을 하는 동시에 자신의 팔에 솜털들이 기지개를 켜듯 일어서는 것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그순간 자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고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이 사람들이 누군 줄 알고 따라나섰지?’ 이런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G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2 즉흥 여행을 떠나다」중에서
“그죠? 적당히 아는 사이라는 말,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적당히 알기 때문에 아무래도 조심하게 되고 적당히 알기 때문에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있고. 저는 오늘 이 여행이 이미 참 즐거워요.” A가 소풍을 떠나기 전날 밤, 잠 못 이루는 초등학생처럼 신이 나서 조잘댔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친하다고,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원래 더 무서운 법 아니에요? 무슨 살인 사건 일어나고, 이런 거 봐요. 대부분 다 가까운 지인이고 면식범이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N이 의미심장하게 G를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하면 어때요? 뜨거운 사이는 되지 말기.
그냥 서로 적당히 아는 사이인 채로 끝까지 남는 거죠.” A가 이런 생각을 한 자신이 기특하다는 듯 흐뭇해했다.
---「2 즉흥 여행을 떠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