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남쪽에 위치한 호주의 6월은 초겨울. 서호주의 거친 땅에 설치한 텐트에서, 도로 옆의 허름한 숙소에서 계절의 서늘함을 뼈저리게 느끼던 낯선 밤이 있었고 붉은 땅이 끝없이 이어지던 낯선 낮의 시간이 있었다.
---「1장 서호주 탐험의 서막이 오르다」중에서
‘애버리진(Aborigine)’. 수만 년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아온 토착 원주민이다. 18세기,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오면서 애버리진 인구수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해 사멸 직전까지 갔다. 식민지가 형성된 후, 감행된 원주민 학살과 서양인들로 인해 유입된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매독, 천연두, 인플루엔자, 홍역 같은 전염병은 결정타였다.
이들의 삶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문명화라는 명목으로 이들의 아이들은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집단 수용 시설이나 백인 가정으로 가야만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선 후에야 호주 정부는 이 악랄한 법을 폐지했다. 오늘날 애버리진은 여전히 정체성 혼란과 차별을 겪고 있다. 술과 약물에 중독된 경우도 빈번하다. 하지만 애버리진에 대한 의식 개혁과 원주민 토지 보상을 목표로 사회운동에 앞장서는 애버리진들도 나타났다.
---「3장 사막을 가로지르고 해안 도로를 달리는 수밖에」중에서
샤크만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오늘날 온전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바로 그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몇백 년 전, 몇천 년 전 과거가 아니다. 정말 까마득하게 먼 35억 년 전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생물체의 원형 아닌가! 고생물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고, 우리가 생명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스트로마톨라이트를 볼 수 있는 덕분이다. 샤크만의 스트로마톨라이트는 살아 있는 박물관 그 자체다.
---「6장 시아노 박테리아가 선사한 진정한 시간 여행」중에서
섬이자 나라이면서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 호주. 그런데 그 넓은 면적에 비해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한국 땅의 80배나 되는 면적에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만 살고 있다. 나라가 텅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 서호주를 호수라고 치면, 한국과 북한 땅을 퐁당 담가도 물이 조금도 넘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넓은 서호주에 고작 270만 명이 살고 있으며, 그마저도 210만 명은 퍼스에 있다. 도시를 제외한 광활한 땅 위에 겨우 60만 명, 다시 말해 서울시 노원구의 인구정도만 사는 꼴이다. 호주 정부는 지금까지도 서호주를 제대로 답사하지 못했다. 당신이 서호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아무 데나 차를 대고 도로 바깥으로 걸어간다고 해보자. 어쩌면 당신은 호모사피엔스 역사상 최초로 그 땅을 밟은 것인지도 모른다. 달까지 갈 것도 없다.
---「6장 시아노 박테리아가 선사한 진정한 시간 여행」중에서
호주 경제는 광산업으로 일어섰다. 땅에 매장된 어마어마한 양의 광물을 채굴하면서 19세기 중반 골드러시가 시작됐고, 이로 인해 호주는 빅토리아 시대 가장 부유한 식민지가 됐다. 당시 황금시대를 맛보기 위해 호주로 이민자들이 밀려왔다. 이후 철광석, 알루미늄, 우라늄, 석탄 등을 대량생산하면서 호주는 광업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오늘날에도 수출액의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광물은 호주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그중 주인공은 철광석! 전 세계 철광석 생산량의 40퍼센트를 차지한다. 우리나라가 수입하는 철광석의 약 60퍼센트가 호주산이다. 호주에서 철광석이 얼마나 흔하냐고? 길을 걷다가 평평한 짙은 색 돌을 주으면 대체로 철광석이다.
---「6장 시아노 박테리아가 선사한 진정한 시간 여행」중에서
서호주는 좀처럼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주 먼 과거에도 그랬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6,000만 년 동안 화산이 폭발하거나 큰 지진이 발생한 적이 없단다. 최근 100년 동안 서호주는 세상 어느 곳과 비교해도 인적이 드문 곳이다. 문명의 발톱을 대부분 피해간 서호주는 오래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운이 좋다면 몇억 년 전에 생성된 암석을 발견할 수도 있다.
---「7장 35억 년 전 바다를 간직한 카리지니 협곡」중에서
서호주 사막은 작은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뱀 10종과 맹독으로 악명 높은 깔때기그물거미, 진드기가 서식한다. 이것이 캠핑장에서만 야영을 해야 하는 이유다. 그나마 캠핑장이 훨씬 안전하니까. 서호주에 있는 동안 우리를 위협하는 동물을 만나지 못해 추위 말고는 별로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여행 내내 우리의 불안함은 더 커졌겠지. 오히려 몰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9장 야생의 밤하늘과 별빛의 세계」중에서
우리의 여정은 마블 바까지가 한계였다. 서호주 북쪽 해변에 미치지 못했고, 필바라의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을 만나보지도 못했다. 탐험 초기 계획이 뒤틀어진 뒤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면서 더 깊은 야생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마블 바에서 내린 갑작스러운 폭우가 삼 일이나 우리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래도 어쨌거나 무사히 잘 돌아왔다.
우리가 서호주에서 한 일이라고는 불안에 떨며 장장 5,000킬로미터 넘게 질주한 것, 밤마다 차가운 땅바닥에서 선잠을 잔 것, 부족한 음식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것뿐이다. 서호주에서 그토록 갈망했던 따뜻한 샤워와 포근한 잠자리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금세 익숙해졌다. 적응이랄 것도, 문명의 소중함에 감사할 겨를도 없었다. 시차 적응으로 인한 어려움조차 겪지 않았다. 완벽하게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에필로그 : 서호주 탐험, 그 후」중에서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패의 원인은 오롯이 나 자신에게서 비롯됐다. 탐험 초기에는 서호주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안일했으며, 무모했다. 탐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는 조바심이 날 지배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생산적인 탐험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나는 탐험 경험을 책으로 써야 했고, 강 작가는 많은 사진과 소리를 수집해야 했다. 서호주를 각자의 작품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탐험을 끝마치고 돌아온 후 책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무엇을 담아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그 후1년, 2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에서 서호주가 되살아났다. 언젠가부터 서호주가 그립고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살아나더니 급기야 마음속에서 판타지 같은 장소가 됐다. 사람이 배우는 방법에는 책 말고도 여행이 있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에필로그 : 서호주 탐험, 그 후」중에서
거의 10년이 되어서야 서호주 탐험에 대한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써 내려가면서 그때의 기억이 더욱 강하게 되살아났고 그곳에 다녀온 느낌을 조금이나마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서호주 이야기를 끝낼 때가 됐다. 완전히 주관적이고 찬란한 기억의 시간, 서호주…….
---「에필로그 : 서호주 탐험, 그 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