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각본집 해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 오리지널 각본. 짜임새 있는 지문과 해설로 오펜하이머의 삶을 빈틈없이 보여준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저자 카이 버드의 헌사와 이론물리학자 박권 교수의 해설은 영화에 대한 더 넓은 이해와 함께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안현재 예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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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출연진 및 크레딧 〈오펜하이머〉 각본 |
저크리스토퍼 놀란
관심작가 알림신청Christopher No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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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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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이곳 로스앨러모스엔 징발이 가능한 남학교 하나와 인디언 매장터 말곤 반경 40마일 안 사방에 아무것도 없어요. 남동쪽 수백 마일 밖까지 사막뿐이죠. 그 안에서 최적의 장소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요.
그로브스: 뭘 위한 최적의 장소? 오펜하이머: ‘성공’. --- p.98 아인슈타인: 그가 답을 알아내겠죠. 오펜하이머: 그 답이 파국이라면요? 아인슈타인: 그럼 멈춰야죠. 발견한 사실을 나치와도 공유해야 하고요. 어느 쪽도 세상을 파멸 못 시키도록. 난 발길을 돌린다 아인슈타인: 로버트? (종이 뭉치를 건네며) 이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 할 일이오. --- p.111 보어: 정치인들에게 이해시켜야 해. 이 새로운 무기가 세상을 바꿀 거라는 걸. 나도 내 할 일을 하겠지만 자넨… (나를 가리킨다) 이제 미국의 프로메테우스가 된 거야. 원자폭탄의 아버지. 인류에게 스스로를 파괴할 힘을 준 자. 세상은 자넬 떠받들겠지. 자네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 p.167 모리슨: 핵무기를 인간에게 쓰는 게 옳은 일일까요? 오펜하이머: 우린 이론가예요. 늘 미래를 상상하죠. 상상은 우릴 두렵게 합니다. 하지만 알기 전엔 두렵지 않고 써보기 전까진 알 수 없어요. 세상이 로스앨러모스의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되면 인류가 경험 못 한 평화가 찾아올 겁니다. 루스벨트가 늘 구상했던 국제 협력에 기반한 평화 말이죠. --- p.182 어두운 천둥의 파도가 밀려오고 끔찍한 아름다움은 곧 공포로 변한다. 번쩍이는 구름이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그 안의 불길이 지옥 같은 주홍색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걸 보며 난 두려움에 휩싸인다. 먼지구름이 자줏빛 열기로 균열을 일으키며 피어오른다.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사막의 대지에 다시 밤이 찾아오자 프랭크가 나를 쳐다본다. 프랭크: (나직하게) 성공이야.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 p.212 나는 몹시 불편한 기색으로 내 두 손을 감싸 쥔다. 오펜하이머: 대통령님, 전 지금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 트루먼이 달라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상의 포켓에서 잘 다려진 흰색 손수건을 꺼내 내밀며 말한다. 트루먼: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누가 폭탄을 만들었는지가 아니고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느냐요. 내가 내렸지. 당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요. 트루먼이 번스에게 손짓을 하고 둘 다 몸을 일으킨다. 나도 자리를 뜬다. 어색하다. 방을 나가는데 들리는 소리. 트루먼: 징징대는 애들은 이 방에 들이지 마. --- p.229 오펜하이머: 미국과 러시아는 마치 병 속에 든 두 마리 전갈과 같습니다. 서로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러려면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야 하죠. 이 정책엔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 전 언급할 수가 없습니다.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죠. 진실을 알아도 그걸 털어놓을 상대가 없고, 또, 그 진실 자체가 너무 극비라서 입 밖에 내거나 머리에 떠올려도 안 되니 말입니다.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솔직함입니다. 워싱턴의 관료들은 이제 국민에게 진실을 알려야 합니다. 원자력 무기 경쟁에 대해 적국이 뭘 알고 있는지 알려야 한다는 겁니다. --- p.235 니콜스: 재판을 할 건가요? 스트로스: 아니. 재판은 오펜하이머에게 판을 깔아주는 거요. 그를 순교자로 만들 순 없지. 오펜하이머의 신뢰성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려서 다신 국가 안보 문제를 거론 못 하게 해야 돼요. 보든: 그 뒤엔요? 스트로스: 비좁고 초라한 조사실에 갇힌 채 모두에게서 잊히겠지…. --- p.247 부시: 이 나라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오펜하이머가 솔직한 의견을 말한 죄로 이런 시련을 겪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에 관한 치졸한 고발 내용을 위원회는 처음부터 기각했어야 합니다. 에반스: 부시 박사, 전 국가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이 청문회에 참여한 겁니다. 부시: 자기 의견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청문회에 앉혀놓고 심판해선 안 되죠. 그럴 거면 저부터 심판하세요. 저도 대중이 싫어할 강경한 의견들을 수시로 말해왔으니까요. --- p.271~272 키티: “공산당과 연관이 있었냐”라는 표현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요. 로버트는 애초에 공산당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거든요. 스페인 난민에게 돈을 보낸 건 압니다. 공산주의 사상에 지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도 알고요. 롭: 공산주의자에 두 종류가 있나요? 지적인 공산주의자와 평범하고 무식한 빨갱이? --- p.282~283 아인슈타인: 당신은 마치 변심한 여잘 쫓아다니는 남자처럼 미국 정부를 짝사랑하고 있어요. 오펜하이머: 당신은 제 심정을 몰라요, 알버트. 아인슈타인: 내가? 난 내 나라를 영영 떠나온 사람이오. 독일에서 일어났던 수년 전의 재앙이 지금 반복되고 있어요. 사람들은 저항 없이 순응하고 악의 세력과 쉽게 결탁하죠. 당신은 조국을 위해 큰일을 했는데 이게 그 대가라면 이 나라를 떠나는 게 옳지 않을까요? --- p.286 스트로스: 그자는 모든 영광은 혼자 누리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고 했어. 그래서 ‘죄 사함’이 필요했던 거야. 순교자 행세가 필요했던 거지. 고난을 당하고 세상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는 순교자. 그래서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아니, 이 길을 계속 가서는 안 돼”라고 떠들어 댄 거야. --- p.293 |
스크린으로 구현된 영상 그 이상의 것을 찾아서
크리스토퍼 놀란이 해석한 '오펜하이머'를 찾아가는 재미 그러나 아쉬움은 있다. 대부분은 물리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가령, 실제로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상영 시간은 3시간 9초이다. 놀란 감독 작품 중에서도 최장의 길이를 자랑하는 이 시간은 놀란 감독이 고집한 아이맥스(IMAX) 필름의 영사기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 중량으로 인해 결정된 ‘영상’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독이자 각본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모든 그림을 스크린에 담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음향 또한 마찬가지이다. 아이맥스 필름 촬영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카메라의 소음 문제에, 현장성을 중요시해 후시녹음을 하지 않는 놀란 감독의 고집이 맞물려, 전작과 마찬가지로 대사 전달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나 여타 음향 논란의 우려가 보이고 있다. 이 각본집은 크리스토퍼 놀란이 쓴 각본을 고스란히 담았다. 스크린으로 100% 구현되지 않는 지문, 해설, 그리고 수정 전의 오리지널 각본은 그가 오펜하이머라고 하는 인물의 삶을 빈틈 없이 추적함으로써 그려내고자 했던 인물의 내면, '놀란이 생각하는 오펜하이머'가 가감 없이 오롯이 드러난다. 감독의 영화적 신념과 기술적, 물리적 한계 때문에 대사 전달력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는 오리지날 각본을 읽음으로써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 이 각본집은 실제로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는 〈오펜하이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또한 영화를 보고 난 후에 각본집을 읽음으로써 놀란 감독이 시공간을 뛰어넘으며 배치해 놓은 각 에피소드가 놀랍도록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도 있다. 이 치밀한 구성을 따라가며 오리지널 각본의 어떤 부분이 스크린에 그대로 재현되었고, 또 수정되었는지를 하나씩 찾아보는 것 또한 팬으로서 결코 놓칠 수 없는 큰 재미이다. 한국어판 각본집을 통해서만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재미들과 함께하는 〈오펜하이머〉 다시 읽기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을 파괴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해야 했던 과학자의 고뇌를 담은 〈오펜하이머〉는 장대하고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전개 양상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나선 오펜하이머의 양심의 가책, 개인적인 고뇌만이 아니라 매카시즘으로 대표되는 시대적인 상황과 정세의 변화를 세심하게 담아냈다. 이는 흥미로운 볼거리인 동시에 관객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진입장벽이기도 하다. 이번 각본집에서는 이러한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추가로 제공한다.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공동 저자인 카이 버드가 각본을 읽고 직접 남긴 헌사가 이번 각본집의 ‘여는 글’로서 실린다. 이 또한 효과적으로 오펜하이머의 삶과 놀란 감독의 각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장치이다. 각본집의 번역은 〈캐리비안의 해적〉,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매트릭스〉, 〈어벤져스4〉 등 굵직한 외화를 번역한 국내 1세대 번역가 김은주 번역가가 맡았다. 그는 특히 블록버스터 영화의 번역가로는 국내 1인자로 손꼽히기도 한다. 영화 번역가들을 항상 괴롭게 만드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면에 드러나는 자막의 길이’이다. 그렇기에 영화 번역은 화면에 들어가는 길이로 압축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대사를 가다듬어 나가는 제약이 있는 예술이기도 하다. 이번 각본집의 번역은 그러한 제약 또한 벗어나 놀란 감독이 쓴 각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호소력 있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어판 한정으로 고등과학원(KIAS) 물리학부장이자 세계적으로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인 박권 교수가 쓴 해설집이 동봉된다. 박권 교수는 지금도 서슴없이 “가능하다면 지금도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다”라고 말하는 영화 매니아이기도 하다. 박권 교수는 오펜하이머의 삶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는 것과 동시에 과학자이기에 공감하고 또, 고민할 수 있는 과학자로서의 무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과학의 발전은 과연 인류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 것인가? 과학자로서의 학자적 양심을 담은 그의 고민은 독자들을 영화에 담긴 놀란의 성찰 속으로 한 발자국 더 깊게 이끈다. |
크리스토퍼 놀란은 훌륭한 감독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각본가다. 플롯이 달라지면 사건들의 관계가 달라지고 삶과 세계를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진다. 플롯의 마술사인 놀란은 시나리오를 쓰며 로버트 오펜하이머라는 현대의 변곡점을 찍은 사람과 그를 둘러싼 혼탁한 시공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관통하고 구조화했다. 비범한 자가 평범한 자로 무릎이 꺾이는 전락의 이야기. 파동과 입자가 모두 가능한 빛처럼 모순적인 양면이 함께 담긴 누군가의/누구나의 분열의 이야기. 서로를 부추기고 부딪친 끝에 손쓸 도리도 없이 닥쳐올 세상의 파멸 예감에 질끈 감은 눈으로 무력하게 대응하는 탄식의 이야기. 하나하나 활자를 짚어가며 재확인할 시나리오에서 더욱 또렷하다. - 이동진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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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경험해 온 극적인 도약의 역사에는 수많은 과학자의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징의 삶을 살았던 오펜하이머는 원자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천재적이었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반발하고 좌절할 만큼 순진하고 어리석었다. 인생의 경로에서 마주친 위대한 과학자들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수천 명의 과학자로 효율적인 팀을 구성하고, 연구자들 모두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빠르게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을 만들어 낸 그의 통솔력이 어디서 시작해서 결국 어떤 결말로 치닫는지 유능한 감독의 생생한 각본과 과학만큼 영화를 사랑하는 훌륭한 전문가의 해설로 만나볼 시간이다. 어쩌면 영화보다 생소하고 복잡한 일생을 보냈던 그의 모든 인생 여정은 우리의 현재에도 깊은 울림과 변화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 궤도 (과학 커뮤니케이터, 『과학이 필요한 시간』, 『궤도의 과학 허세』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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