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네 뼈대는 좀 쓸 만하냐?” “튼튼하죠. 그런데 할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아니고…….” 할아버지는 허삼관의 말을 가로막고 계속해서 물었다. “아들아, 너도 피 팔러 자주 가느냐?” 허삼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전 피를 판 적이 없는데요.” “피도 안 팔아봤으면서 무슨 뼈대가 튼튼하다는 소릴 하느냐? 나를 속이려 드는구나.” “할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 무슨 말씀이신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요. 혹시 노망드신 거 아녜요?” --- p.20
허삼관이 그 깨진 거울을 손에 들고 먼저 자기 눈을 보고 다시 일락이의 눈을 보니, 그 눈이 그 눈이었다. 다시 자기 코를 비춰 보고 일락이의 코를 보니, 역시 그 코가 그 코였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모두 일락이가 날 안 닮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닮은 구석이 있구만.’ 일락이가 멍하니 자기를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를 보다가 저를 보고…… 도대체 뭘 보시는 거예요?” “네가 나를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 보는 거야.” --- p.59
“어이, 찻잔 일곱 개 준비하고, 물 한 주전자만 끓이라고. 통 속에 찻잎이 아직 남아 있나? 손님이 일곱 분이나 오셨다구…….” 허옥란은 속으로 무슨 손님이 그리 많이 왔나 하고 생각하며 나왔다가, 방씨 일행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허삼관에게 말했다. “집을 들어내려고 온 사람들이잖아요.” “집을 들어내러 온 사람은 손님이 아닌가? 빨리 가서 물부터 준비해.” 방씨 일행이 문 앞에 짐수레를 세워놓고 허삼관에게 말했다. “나도 방법이 없네. 20여 년이나 서로 험한 꼴 안 보이고 지낸 사인데……. 나도 방법이 없어. 내 아들이 병원에서 돈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오. 돈이 없으면 약을 주지 않겠다니……. 내 아들 머리가 일락이한테 박살 난 이후로 내가 당신 집에 와서 행패 부린 일 있소? 없을 거요. 병원에서 마냥 당신이 돈 주기를 기다린 지 벌써 2주일이 지났소…….” 허옥란은 문간의 한가운데에 양팔을 벌리고 앉아 들어오려는 이들을 막았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 물건들을 가져가지 마세요. 이 집은 제 생명과 같다구요.” --- p.106
“애들 줘.” “그럴 순 없어요. 이건 당신을 위해서 끓인 거라구요.” “누가 마시면 어때. 똥으로 변하기는 마찬가진데. 애들 똥이나 더 싸게 하라구. 애들 마시게 해.” 허삼관은 세 아들이 그릇을 받쳐 들고 설탕이 든 옥수수죽을 꿀떡꿀떡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희들 다 마시고 나서 모두 나한테 절을 해라. 내 생일 선물로 치게 말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낯 뜨거운 생각이 들어 둘러대듯 한마디 덧붙였다. “이 고생이 언제쯤 끝이 나려나. 자식들이 불쌍하게 단맛도 잃어버리고, 단것을 먹고도 설탕인지 뭔지도 모르니 말이야.” --- p.166
“배고프고 졸려요. 뭘 좀 먹고 자고 싶어요. 절 친자식으로 여기지는 않아도 하소용보다는 아껴주실 것 같아서 돌아온 거예요.” 이렇게 말하며 일락이는 벽을 짚고 일어나 다시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이 쪼그만 자식이 정말 가려구 그러나…….” 걸음을 멈춘 일락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온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울었다. 그 모습을 본 허삼관이 일락이 앞에 쪼그려 앉아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업혀라.” 허삼관은 일락이를 업고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골목을 지나 큰길로 접어들었는데, 그 길은 바로 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 옆으로 난 길이었다. 걸어가는 중에도 허삼관의 입은 일락이에게 쉴 새 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 p.197
“이런 철면피 같으니라고. 자네 그 두꺼운 얼굴을 봐서 내 한 가지 방법을 일러주지. 여기서는 피를 팔아줄 수가 없고, 다른 곳을 찾아보게나. 다른 병원은 자네가 얼마 전에 피를 팔았다는 걸 모르니, 아마 피를 사줄 거야. 알겠나?” 이 혈두는 허삼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날카롭게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 피 팔다 죽어도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