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별했던 자매 사이가 어색해진 건 두 번 연속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시기부터였다. 인숙은 은실과 사이가 틀어진 은주를 애써 다독였다. “네 언니는 널 생각해서 그런 거야.” 그러나 은주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언제까지 공부만 할 거냐고 묻는 은실에게 보란 듯이 합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믿었던 존재에게 응원을 받지 못했다는 좌절감과 원망은 오기로 이어졌다. 바득바득 우겨서라도 끝내 합격하는 것이 언니 앞에서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제일 타당한 복수로 여겨졌다. 늦은 밤, 은주는 도서관을 나올 때에야 비로소 은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병원에서 너랑 이름이 같은 여자를 만났어. 이름이 김은주였어. 그냥, 그래서 네 생각이 났어. 잘 지내나 궁금하기도 하고
--- p.14~15
학원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밤이었고, 정신을 차리면 아침이 왔다. 한데 같이 일하게 된 성은은 달랐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시기부터 퇴사를 입에 달고 살아가는 친구들이나 좀비처럼 무감각하게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자신과는 다른 생기를 지닌 건 어떤 이유 때문인지 궁금했다. 성은에게는 진득하게 눌어붙은 유증기 같은 권태와 피로가 없는 점이 생경했다. 성은에게서 풍기는 무해한 생기는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서 비롯된 걸까. 무언가를 듣고 몰입하는 일이 마음을 온화한 흐름으로 이끌어주는 건지도 모른다.
--- p.26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부서 간의 업무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기 애매할 때가 있다는 것, 누군가는 책임을 떠밀며, 서로 간의 불편한 견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성은에게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연차가 쌓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정이현 팀장이 어린 나이에 팀장이 될 수 있었던 점과 과장 신분인 은실이 편집부 전체의 일을 떠안게 된 상황도 분명 성은의 눈에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반응했지만 은실은 그 모든 상황에 완벽하게 관심을 꺼둘 만큼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신입 시절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과 상황만 바뀌었을 뿐 문제는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회사를 벗어나는 순간, 업무와 관련한 스트레스와 고민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는 게 최선일 뿐이었다.
--- p.46
주지해온 결과가 뒤집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계획한 것과 다르게 흘러갔다. “난 네가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으면 해. 우리 약속했잖아. 엄마처럼 살지 않기로.” 은실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남자로 인하여 평생을 고생해온 인숙과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에 비춰봤을 때, 갑작스럽게 공부를 그만둔 것도, 차진과의 불완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은주는 떳떳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간혹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걸을 때의 움츠러든 어깨를 은실에게 무방비한 상태로 들키고 싶다고. 초라한 민낯을 발각당하면 부끄러운 일이 더는 악착같이 숨겨야 할 수치가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 p.107~108
남자의 말처럼 은실이 원한 건, 평온한 공간이었다. 적막함이 흐르는 곳이 아니라 잔잔한 곳, 불편한 소음을 대신할 따뜻한 소리가 머무는 공간. 무인도같이 홀로 동떨어져 있긴 싫지만 조용한 곳이 절실한 날, 숱한 목소리가 잠겨 있는 책의 바다에 잠수하는 쪽을 택하는 것도 괜찮은 방식 같았다. 불쑥 눈에 띈 문장이 마음을 옮겨놓은 것만 같을 때 고개를 끄떡이고, 잘못 끼워져 있는 책을 제자리에 꽂아두는 사소한 선행으로 혼자 뿌듯해하는 일도 좋았다. 은실은 편집자가 아닌 한 명의 독자로 서점에 오면 색다른 기분을 느끼곤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책들 앞에 서면 사소한 끌림만으로도 낯선 표지를 들춰볼 수 있었다. 분석해서 읽지 않아도 되며, 한 문장 앞에서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 p.145
속내를 꺼내 보인 적 없던 은실의 첫 이야기는 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주었다. 사적인 고뇌 끝에 내린 은실의 선택에 대하여 은주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이유나 판단을 덧대지 않은 순수한 응원과 격려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시기를 거친 뒤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까. 은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민에 대한 결론을 내는 데 있어 더는 연인의 충고나 미래의 불안에 어영부영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비로소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됐을 때, 다른 이들의 호오와 판단을 떠나 이렇게 하고 싶어졌어, 라고 언니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고백에 대한 은실의 답이 응원이었으면 좋겠다고 은주는 바랐다.
--- p.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