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터전은 일정한 경계로 공간을 구별한다. 울타리로 구별된 경계 안쪽에는 건물이 있고, 건물 이외의 공간은 집주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된다. 울타리와 건물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공간을 흔히들 정원이라고 부르지만, 그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떠오르는 대로 열거해 보겠다. 원(園, 苑), 정(庭), 정원(庭園, 庭苑), 원정(園庭), 원정(園亭), 원림(園林), 원유(園?, 苑?), 화원(花園), 임천(林泉) 등이 있다. 비슷해 보이지만 맥락에 따라 의미가 약간 다르다. 우리말에도 그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 있다. 뜰, 뜨락, 마당 등이 떠오른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데, 이 역시 맥락에 따라 단어마다 어감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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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은 이렇게 물었다. 아무리 누추하고 초라한 집에 산다고 해도, “그곳에 군자가 살고 있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사소할지 모르지만, 작은 뜰에서 던지는 질문이 때로는 시공을 넘어 지금의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그 질문들이 역사에 울림을 주었고, 사람의 생각을 바꾸었으며, 세상을 흔들었다. 설령 세상을 뒤흔들 만한 대단한 질문이 아니면 또 어떻겠는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소박한 질문을 던지는 모습에서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멋진 태도를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 p.43~44
연경 골목 한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채마밭이었지만, 이곳은 천하를 읽어 내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작은 움직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천하를 위한 질문을 던지는 이곡의 내공이 깊은 덕분이다. 이것이야말로 노자(老子)의 말을 인용하여 표현한바, ‘문을 나서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안다’(不出戶庭知天下)는 말과 정확히 통한다.
--- p.61
자본이 우리의 등을 떠밀고, 노골적으로 거기에 편승해서 자신의 욕망을 무한대로 넓혀 나가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책을 읽으면서 욕망을 버리라고 우아하게 충고하는 일은 늘 고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그렇지만 오랜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고, 우리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좋은 세상으로 가려는 희망을 발견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우리 삶을 돌아보는 것은 현대 문명의 거센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마음을 다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 p.138
이수광은 좁은 비우당 뜰에서 은거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과 정신은 세계를 유영(遊泳)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이수광은 좁은 방 안에 앉아서 온 천하를 유목하던, 위대한 노마드였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깊이 파 놓은 홈 파인 공간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갔던 곳이 바로 그의 작은 뜰이었다. 중화 문명의 공간을 넘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지역을 기록하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우당 뜰에서 다양한 책을 읽고 정리하며 질문을 던지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지봉유설』을 써 나갔던 이수광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자유롭고 새로운 것이었던가. 문을 닫고 세속의 발길을 끊었지만, 오히려 그의 뜰이 천하를 상상하게 만드는 무한대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 p.162
여항인들의 시사들은 역사 속에 명멸했지만 그중 빛나는 별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송석원시사다. 지금은 서울 도심의 확대와 함께 옛 모습을 거의 잃었지만,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왕산 인근은 서울 근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승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인왕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이 몇 줄기 있지만 그중에서도 옥류동(玉流洞)은 백련봉(白蓮峰)에서 필운대로 흘러내리면서 굽이마다 승경을 감추고 있었다. 시냇물이 옥과 같이 맑아서 옥류계(玉流溪)로 불리기도 했던 이 시내를 따라 골짜기로 들어가면서 많은 명사들이 집터를 잡았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