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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저 / 이진 | 과학과이성 | 2024년 09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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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04쪽 | 148*210*20mm
ISBN13 9791198502889
ISBN10 1198502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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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승상은 놀라운 꿈을 꾸었다.
정무를 마치고 홍희문 밖의 집으로 일찌거니 귀가한 승상이 피로에 지쳐 사랑채 난간에 살포시 기대어 쉬고 있을 때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마당 가득 내려앉고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어디선가 은은한 향기가 실려 오고 기이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한 줄기 바람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승상은 날개라도 돋친 양 하늘 가운데로 부웅 떠올랐다. 구름을 이고 선 기암괴석과 짙푸른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호숫가를 따라 늘어선 버드나무 가지들이 춤추듯 나부꼈다. 천만 갈래로 휘늘어진 가지들 사이에선 황금 꾀꼬리들이 천상의 목소리로 지저귀었다. 온갖 향기로운 꽃들이 만발한 숲에선 푸른 학과 흰 두루미, 물총새와 공작새들이 다투어 자태를 뽐내었다.
승상은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계곡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갔다. 하늘 높이 치솟은 절벽이 쓱쓱 길을 열었다. 장쾌하게 쏟아지는 폭포수 사이로 오색구름이 영롱하였다.
문득 길이 끊어졌다. 놀란 승상이 흡, 숨을 들이키는 순간 뇌성벽력이 몰아쳤다.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고 천둥소리가 산허리를 쪼개었다. 온 천지가 요동을 치며 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졌다. 저 아래 깊은 계곡에서 거대한 뭔가가 우르릉거리며 솟구쳐 올랐다. 승상은 두려움에 떨며 주저앉았다.
푸르스름한 무엇인가가 그를 감싸며 휘돌았다. 거대한 청룡이었다. 깃처럼 세운 등 비늘이 반짝거렸다. 아침 바다의 윤슬처럼 눈부셨다. 청룡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어 한소리 크게 내질렀다. 그 광경에 승상은 넋을 잃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한참을 울부짖던 청룡이 고갤 숙이더니 승상을 바라보았다. 홉뜬 두 눈이 어찌나 크고 날카롭고 매서운지 승상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 수조차 없었다. 그 순간 용이 뜨거운 입김을 토해내며 훅, 승상의 몸속으로 들어왔다.
--- pp.12-13

어느 날, 승상이 길동을 데리고 안채에 들었다. 길동은 안방마님이 묻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거침없이 답하고 또 슬기로운 의견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참으로 신동이로구나. 아깝다, 너의 재주가!”
승상은 부인의 탄식을 놓치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건만 부인을 향한 타박의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러게나 말이오. 생각할수록 원통한 건 부인의 고집 아니겠소?”
승상과 부인이 마주 보며 한숨을 쉬는데 문득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왜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승상이 하인을 불러 묻자 처음 보는 여인이 마당으로 쓱 들어서며 아뢰었다.
“소란을 끼쳐 죄송합니다. 저는 동대문 밖에 사는 미천한 자이나 어려서 한 도인을 만나 관상 보는 법을 배웠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솔직하게 얘길 해주다 보니 제 비루한 이름이 제법 알려지게 되었습지요. 도성 안의 양반댁치고 관상을 봐 달라며 저를 불러들이지 않은 집이 거의 없다시피 하답니다. 우연찮게 대감님 댁 앞을 지나다 생각해 보니 이 댁에선 아직 절 부르지 않으셨더란 말입지요.”
여인의 말이 심히 맹랑하였으나 부인은 흥미를 느꼈는지 여인을 안으로 들이라 하였다. 부인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찌 불러주지 않았냐고 따지기라도 할 셈이었던 것이냐?”
여인이 펄쩍 뛰며 말하였다.
“감히 천한 관상쟁이 따위가 어찌 그런 맘을 품을 수 있겠는지요? 다만 집의 기운만으로도 덕과 복이 넘쳐흐르는 걸로 보아 가족 중에 틀림없이 존귀한 분이 계시리라 싶어졌답니다. 비록 천한 눈이나마 그런 분의 관상을 한번 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겨났을 뿐입지요.”
--- pp.28-29

그날 밤, 부인은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초란에게 알아서 하라 고개를 끄덕여 주긴 했으나, 차마 사람으로서 하지 못할 짓을 허락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관상쟁이 여인의 말만 믿고 대감과 집안을 위한답시고 너무 성급히 결정한 건 아닌가 싶은 후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큰아들 길현이 부인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곡산 어미가 설마 그렇게까지 빨리 처결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허락을 취소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일이 벌어져 버렸다면 그땐 어찌하면 좋으냐? 대감께서 얼마나 진노하시겠느냐?”
길현이 다시 한번 부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우리 가문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불미스런 사태가 이미 벌어졌다면 그 또한 길동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니 그리되었을 경우 길동의 어미가 통한을 잊고 일생을 편히 살아가도록 더욱 후대해 주시지요. 길동을 위해서는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 억울하고 서글픈 마음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초란에게 자신이 휘둘린 것만 같았다. 그런 음험한 일에 큰아들 길현까지 끌어들였으니 자신의 어리석음이 외려 집안에 망조를 들이는 게 아닌가 싶어지기까지 했다. 부인은 날이 밝으면 곧장 초란을 불러들여 지난밤의 허락을 거두어들이리라 마음먹었다.
--- pp.50-51

눈꽃 낭자는 배를 타고 포구에 도착한 뒤로 마방에서 말을 빌렸다. 그러고는 몇백 리를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날이 저물자 낭자는 어느 주막에 묵게 되었다. 며칠 전 나타난 활빈당의 장수 홍길동으로 하여 주막 안은 온통 시끌벅적했다.
“시상에나,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는 가난을 우리 홍길동 대장께서 구해 주신다니 참말로 감복할 뿐이여.”
“저기 오리재 너머 할마씨 이야기 들었는가? 금방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을 지경임서도 옥수수 종자 한 줌을 차마 못 삶아 묵고 내년에 심을라고 애껴놨드랴. 근디 못된 아전 놈이 세금 거둔담서 그걸 다 털어가드라네. 고걸 심어야 내년에 세금이고 뭣이고 간에 내들 않겄냐고 울며불며 매달려도 아조 몰강시럽게 훑어 가드라여. 근디 어찌 되었겄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낫겄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우리 홍길동 나리가 그런 못된 놈을 가만 놔뒀겄어? 여덟 명 홍길동이면 눈이 열여섯 개 아녀? 어디서 감히 그 눈을 속여 묵을라고?”
한두 잔 술에 기분이 거나해진 치들이 서로 한마디라도 더 하겠다고 설쳐댔다.
“맞어. 할매가 아조 살판 났당만. 몹쓸 병에 걸려 오늘 낼 하든 딸내미 병도 고치고…. 근디 그 홍 장군은 어째서 우리 집에는 안 오시는가 몰러.”
“아따, 묵고 살만한 놈이 뭔 욕심이라냐? 도치기 맹키로 혼자만 잘 묵고 잘 살라다간 우리 홍길동 나리가 느이 집을 털러 나설지도 모르제. 하기사 그러코롬 됨사 느이 집에도 왕림을 하시기는 하겄다야!”
왁자지껄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오라비가 바로 그 홍길동이란 도적 때문에 옥에 갇혔으므로 낭자 입장에서야 그리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다. 낭자는 정말로 모르는 척하며 사람들을 떠보았다.
--- pp.109-111

여덟 길동은 쇠사슬에 묶인 채로 대궐 마당을 빙빙 돌며 춤까지 추어댔다. 목소리가 어찌나 쩌렁쩌렁 울리는지 궐문 밖까지 퍼져나갔다. 귀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가락이 절로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궐 안에서든 밖에서든 자기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자가 생겨났다. 궁궐의 담을 돌며 어깨춤을 추는 자도 있었다.
신하 하나가 임금께 아뢰었다.
“길동의 아비 되는 자를 불러 진짜 홍길동을 찾아내라 하면 어떨지요? 자기 자식을 못 알아볼 아비는 없지 않겠습니까?”
임금께서 그 말이 옳다 여겨 즉시 전 승상 홍문을 부르라 일렀다. 길동이 잡혔다는 소식에 마음 졸이고 있던 승상은 임금의 명을 받고 즉시 대령하였다.
“경의 아들 길동이 과연 하나인 게 맞는가? 이제 여덟이 눈앞에 나타나 서로 길동이라 우기니 이 무슨 연고인가? 아비인 그대가 저들 중 진짜를 가려 과인의 눈을 더 이상 어지럽히지 말라.”
승상이 몹시 죄스러운 낯빛으로 고갤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이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해 천첩을 곁에 둔 죄로 천한 자식을 낳아 전하의 근심이 되고 나라가 시끄러우니 신의 죄가 천만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하얗게 센 승상의 수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가 여덟 길동을 향하여 꾸짖어 말하였다.
“진정으로 내 아들 길동이 이 중에 있으렷다! 참으로 몹쓸 자식이로구나. 네 아무리 불효 불충한 놈이라도 어찌 그런 해괴한 짓으로 전하의 성총을 가리고 이 애비를 우롱한단 말이냐? 썩 나와 왕명을 받잡고 내 죄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하라. 만일 벌을 피하고자 망령된 행태를 계속한다면 내가 네 앞에서 죽고야 말리라. 이로써 전하의 분노를 만분의 일이나마 기워 갚을 수 있다면 어찌 내 죽음 따위가 두렵겠느냐?”
--- p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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