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333 “모든 것을 다 새로 시작하지요. 지나간 일을랑 왼통 잊어버리고 새로 모든 것을 시작하지요. 이전에는 남의 뜻대로 살아왔거니와 이제부터는…….” 하고 여학생은 잠깐 말을 멈추고 영채를 바라본다. 영채는 얼굴이 붉게 되고 숨이 차며 여학생의 눈과 입에 매어달린 것 같다가,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요?” 한다. “이제부터는 제…… 뜻…… 대…… 로…… 살아간단 말이야요.” 기차는 산속을 벗어나서 서흥 벌판으로 달아난다. 맑은 냇물이 왼편에 있다가 오른편에 가다가 한다. 두 사람은 잠자코 바깥을 내다본다.
p. 447 “옳습니다. 교육으로, 실행으로 저들을 가르쳐야지요, 인도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하나요?” 하고 형식은 입을 꼭 다문다. 세 처녀는 몸에 소름이 끼친다. 형식은 한 번 더 힘 있게,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고 세 처녀를 골고루 본다. 세 처녀는 아직도 경험하여 보지 못한 듯한 말할 수 없는 정신의 감동을깨달았다. 그리고 일시에 소름이 쪽 끼쳤다. 형식은 한 번 더, “그것을 누가 하나요?” 하였다. “우리가 하지요!” 하는 기약하지 아니한 대답이 세 처녀의 입에서 떨어진다. 네 사람의 눈앞에는 불길이 번쩍하는 듯하였다. 마치 큰 지진이 있어서 온 땅이 떨리는 듯하였다.
《무정》에는 부잣집 딸 선형, 그녀의 개인교사 형식, 오래전에 형식과 정혼했던 평양 기생 영채가 등장한다. 형식은 선형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던 중 옛 은사의 딸 영채의 소식을 듣는다. 투옥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기생이 된 영채는 어릴 적 미래를 약속했던 형식을 찾아다녔고, 온갖 어려움을 겪다가 뒤늦게 형식의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형식을 찾아 상경한 영채는 경성학교 배 학감에게 순결을 빼앗긴 뒤에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자살을 결심한 영채는 우연히 동경 유학생인 병욱을 만나면서 신세계에 눈뜨기 시작한다. 영채는 음악과 무용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영채와 선형 사이에서 고민하던 형식은 결국 선형과 약혼한다. 유학길을 떠난 기차에서 다시 만난 형식과 영채, 병욱, 선형 등은 외국에서 학업을 마치면 고국에 돌아와 문명사상의 보급 등에 함께 힘쓸 것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