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인생 p. 54~55
“왜? 내 자식이라고 공장에 못 보내란 법 있답디까?”
“아?니, 정말 그래요?”
“정말 아니고?”
“괜히 실없는 소리! …… 자제라고 해야 들여줄 테니까 그러시지?”
“아니, 그건 그렇잖애요. 내 자식놈야요.”
“그럼 왜 공부를 시키잖구?”
“인쇄소 일 배우는 것도 공부지.”
“그건 그렇지만 학교에 보내야지.”
“학교에 보낼 처지도 못 되고 또 보낸댔자 사람 구실도 못할 테니까…….”
“거참 모를 일이오…… 우리 같은 놈은 이 짓을 해가면서도 자식을 공부시키느라고 애를 쓰는데 되려 공부시킬 줄 아는 양반이 보통학교도 아니 마친 자제를 공장엘 보내요?”
“내가 학교 공부를 해본 나머지 그게 못쓰겠으니까 자식은 딴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이지요.”
“글쎄 정 그러시다면 내가 내 자식 진배없이 잘 데리고 있으면서 일이나 착실히 가르쳐드리리다마는…… 원 너무 어린데 애차랍잖애요?”
“애차라운 거야 애비 된 내가 더하지오만 그것이 제게는 약이니까…….”
(중략)
이튿날 아침 일찍 창선이를 데리고 ××인쇄소에 가서 A에게 맡기고 안 내키는 발길을 돌이켜 나오는 P는 혼자 중얼거렸다.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치숙 p. 59~60
우리 아저씨 말이지요? 아따 저 거시키, 한참 당년에 무엇이냐 그놈의 것, 사회주의라더냐 막덕이라더냐, 그걸 하다 징역 살고 나와서 폐병으로 시방 앓고 누웠는 우리 오촌 고모부 그 양반…….
머, 말도 마시오. 대체 사람이 어쩌면 글쎄…… 내 원! 신세 간데없지요.
자, 십 년 적공, 대학교까지 공부한 것 풀어먹지도 못했지요.
좋은 청춘 어영부영 다 보냈지요. 신분에는 전과자라는 붉은 도장 찍혔지요. 몸에는 몹쓸 병까지 들었지요. 이 신세를 해가지굴랑은 굴속 같은 오두막집 단칸 셋방 구석에서 사시장철 밤이나 낮이나 눈 따악 감고 드러누웠군요.
재산이 어디 집 터전인들 있을 턱이 있나요. 서발막대3 내저어야 짚 검불 하나 걸리는 것 없는 철빈인데. 우리 아주머니가, 그래도 그 아주머니가, 어질고 얌전해서 그 알량한 남편 양반 받드느라 삯바느질이야 남의 집 품빨래야 화장품 장사야, 그 칙살스러운 벌이를 해다가 겨우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지요.
어디루 대나 그 양반은 죽는 게 두루 좋은 일인데 죽지도 아니해요.
우리 아주머니가 불쌍해요. 아, 진작 한 나이라도 젊어서 팔자를 고치는 게 아니라, 무슨 놈의 우난 후분을 바라고 있다가 끝끝내 고생을 하는지.
논 이야기 p. 364~365
“일인의 재산이 우리 조선 나라 재산이 되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당연?”
“그렇죠.”
“흥, 가만 둬두면 저절루 백성의 것이 될 걸 나라 명색은 가만히 앉었다 어디서 툭 튀어나와가지구, 걸 뺏어서 팔아먹어? 그따위 행사가 어딨다든가?”
“한 생원은 그 논이랑 멧갓이랑 길천이한테 돈을 받구 파섰으니깐 임자로 말하면 길천이지 한 생원인가요?”
“암만 팔았어두, 길천이가 내놓구 쫓겨 갔은깐, 도루 내 것이 돼야 옳지, 무슨 말야. 걸, 무슨 탁에 나라가 뺏을 영으루 들어?”
“한 생원한테 뺏는 게 아니라, 길천이한테 뺏는 거랍니다.”
“흥, 둘러다 대긴 잘들 허이. 공동묘지 가보게나. 핑계 없는 무덤 있던가? 저, 병신년에 원(군수)놈 김가가 우리 논 열두 마지기 뺏을 제두 핑곈 다 있었드라네.”
“좌우간, 아직 그렇게 지레 염렬 하실 게 아니라, 기대리구 있느라면 나라에서 다 억울치 않두룩 처단을 하겠죠.”
“일없네.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길 삼십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왔을려드냐. 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이 됐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야?”
그러고는 털고 일어서면서 혼잣말로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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