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 조영의 시작은 천리를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성리학으로 무장한 개혁적 인물들이 개국했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견인차인 임금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궁궐 구조물 곳곳에 상징으로 나타냈다. 눈만 뜨면 시야로 들어오는 경복궁의 온갖 길상 문양, 일화문·월화문·건춘문·영추문 등 사대문은 물론이고 일월오봉도·사신상과 십이지신상·단청·전각의 배치 등 거의 모든 표현과 구조가 천리와 지리에 묻어나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양 천도와 창건: p.26
광화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라는 사실을 한눈에 보여준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기단에 삼문형식이다. 그러나 경복궁의 사대문(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은 석축을 높게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터서 문루를 얹은, 성곽문과 같은 구조다. 다른 궁의 문이 규모 있는 시설의 대문 정도라면 경복궁 사대문은 궐문이다. ……광화문은 태조 4년 9월에 세워졌다. 창건 때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다는 것 말고는 밝혀진 게 없고, 세종의 부탁을 받은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 지었다. ‘광화(光化)’는 《서경》의 ‘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가르침이 만방에 미침)’에서 따온 말이다. ‘光天化日(밝은 세상과 안정된 시대)’의 줄임말로도 본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를 마감하고 밝고 안정된 정치로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통치자의 염원을 담은 것이다.
---광화문: p.114
근정전의 처마는 활등처럼 굽은 완벽한 호상(弧狀)이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의 각도 차이를 두고 일정하게 서까래를 배열했기 때문이다. 치밀한 계산 아래 정연한 변화를 준 서까래는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렬되어 있다. 따라서 도리에 걸린 서까래는 위아래, 내민 머리의 위치가 모두 다르다. 호선을 이룬 이 궤적을 계속 따라가면 반대쪽 추녀와 만난다. 곧 하늘에 커다란 타원이 크려지는 것이다. 조정, 행각, 기단을 네모꼴로 조직하여 지상세계[地方]를 형상화했다면 지붕은 원의 속성을 부여하여 하늘[天圓]을 나타낸 것이다. 근정전의 구조는 천원지방, 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근정전 일곽: p.151
경회루를 칸, 기둥, 창호 수에 3, 8, 12, 24, 48, 64가 적용돼 있다. 다른 주요 전각이 양수(陽數) ‘5’와 관련된 체계인 데 반해 경회루는 물을 상징하는 음수(陰數) ‘6’과 관련된 구조다. 이는 경회루가 연회 장소라는 점 이외에 화기를 물로 제압하다는 주역적 사고가 작용한 까닭이다. 중창 당시, 이 역사(役事)에 깊이 간여한 정학순은 <경회루전도>에서 경회루가 《주역》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정학순은 6이 팔괘에서 큰물을 나타내는 수이며 경회루 구조는 6궁의 원리를 따랐다고 했다. ---경회루: p.217
신무문(神武門) 쪽은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왕은 후원에서 행사가 있을 때 이 문으로 출입했다. 신무문 밖에는 공신들의 결속을 다짐하는 회맹단이 있었다. 왕이 공신들의 충성을 다잡이하는 회맹제에 참석할 때도 신무문으로 나갔다. 신무문은 음기가 드세다 하여 평소에는 닫아두었다. 그래서인지 이 문의 이력에는 음습한 어둠의 그림자가 묻어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신무문은 힘자랑하던 사람들이 국면을 역전시키고자 할 때 은밀하게 드나들었던 곳이다. 1519년(중종 14년), 홍경주 등 훈구 세력들이 왕의 밀명을 받고 조광조와 사림파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깊은 밤중에 입직 승지들도 모르게 이 문으로 들어왔다. 그때의 참극을 기묘사회 또는 ‘신무의 난’이라고도 한다.
---신무문을 나서면: 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