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한국에서 어떤 문제든 늘 ‘반성 없는 일본’으로 이어지기 쉬웠던 이유 중에는 일본 우파의 발언과 행동의 배경에 일본의 전후 교육과 교과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점이 있다. 물론 패전 후에도 정말은 전쟁 책임을 져야 할 천황제가 유지되었고 보수 자민당 체제가 바뀌지 않았으며 이른바 ‘전범’ 출신이 정치체제에 깊숙이 다시 포진되었고 여전히 재일교포는 차별받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전후의 일본과 전전의 일본의 ‘단절’에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의구심이 그동안 별문제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전후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나카노, 박유하 등). 그러나 그러한 그들, 이른바 ‘양심적 지식인’들과 시민들을 낳은 것 역시 다름 아닌 전후 일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이 아직 다수인 것이 분명한 이상, 일본이 전후에 지
향했던 ‘새로운’ 일본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는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대전제는 재고될 필요가 있다.
---「교과서 ?‘긍지’에서 ‘책임’으로」중에서
정대협 관계자가 돈을 수령한 이들을 두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동정금을 받으면 피해자는 자원해나간 공창이 된다”(윤정옥, 1997년 2월의 시민연대 주최 국제 세미나)고 비난했다는 것은, 위안부를 지원하는 이들에게조차 위안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어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국민기금을 ‘돈 때문에 받’았다고 비난한 일은 과거에 실제로 ‘돈 때문에’ 자신의 신체를 판 처참한 경험이 있는 그들을 두 번 울린 일은 아니었을까. 설령 그들이 ‘돈 때문에’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비난할 자격이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이러한 정대협의 단정은, 억압받는 하위 계층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그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늘 상위 계층이라며 “서벌턴(subaltern)은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스피박(G. Spivak)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위안부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중에서
‘야스쿠니(靖國)’란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야스쿠니신사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하는 평안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안이란 무엇보다 일상의 지속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이익을 대표하는 기관이라면, 국가는 무엇보다도 편안한 일상과 행복 추구의 권리를 만족시키는 의무를 지닌다. 전쟁은 그 어떤 정의의 전쟁일지라도 일상을 파괴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야스쿠니신사가 진정으로 국가의 평안을 생각하는 장소가 되려면 국가에 몸 바치는 일이 정말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케 하는 장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전사자들의 죽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한 야스쿠니 참배 문제는 장소를 바꾼다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야스쿠니 ?‘사죄’하는 참배」중에서
국경은 민족과 언어에 바탕을 둔 혈연적?문화적 경계와 함께 강이나 산맥을 통한 자연적 경계를 기반으로 해서 그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막기 위한 경계가 아니라 소통하기 위한 경계가 되어야 한다. 경계는 넘어가 만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선이라야 한다. 만나는 시간보다 만나지 않는 시간이 더 많아서 말하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즐겁게 상상할 수 있는 그런 경계여야 한다. 경계 내부의 구성원만을 위한 이기적 경계라면, 그런 담을 쌓는 경계라면, 장래의 반목과 불화만을 잉태하고 있는 그런 경계라면, 차라리 없애는 것이 낫다.
전쟁을 하면서까지, 즉 평화를 훼손하면서까지 ‘지킬’ 가치가 있는 영토란 없다. 설령 그곳에서 엄청난 가스가 나온다 하더라도 혹은 엄청난 양의 물고기가 잡힌다 하더라도, 나아가 외화를 벌어들일 엄청난 관광자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독도가 낳을 수 있는 최상의 가치는 한일 간의 평화다.
---「독도 ?다시 경계민의 사고를」중에서
한일이 함께 싸워야 할 것은 단일한 주체로 상상되는 ‘일본’이거나 ‘한국’이 아니라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는 전쟁을 열망하는 폭력적인 감성(고바야시 요시노리)과 군사 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전쟁에 대해 사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식의 전쟁에의 욕망(니시오 간지) 쪽이다. 폭력적 사고와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배타적 민족주의 담론에 함께 저항할 수 있을 때 한일 간의 ‘우정’은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공포는 경계심과 폭력을 부른다. 공포를 야기하는 것이 상대에 대한 무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한일 양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의 아픔에 대해 좀 더 아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한일의 젊은이들이, 폭력적인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전쟁을 용인하는 민족주의적 지식인들과 정치가들에 대항해 함께 그들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날, 자신들의 행복한 일상과 사적 관계를 깨버리고 말, 그래서 그들의 인생을 온통 망가뜨리고 말 국가의 부름을 인터넷을 통해 거부할 수 있는 신뢰 관계가 만들어지는 날, 상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폭력적 사고를 거부하는 촛불 시위가 한일 간에 가능한 날, 그날, 우리는 100년 전의 잘못된 시작이 남긴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100년을 준비할 수 있다.
---「화해를 위해서」중에서
그런 의미에서도 독도 문제는 일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근대 국민국가 시대에 먼저 ‘편입’한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물론한국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국주의 시대에 빼앗긴 그저 ‘역사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냉전이 임계점을 넘어 열전(熱?)이 된 시대에 한국을 서방 측에 남겨두기 위해 전쟁의 주역이기도 했던 미국의 의사에 따라 애매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미국이 남긴 ‘냉전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경계’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경계’에 실제로 사는 이들이 아니라 ‘중심’에 존재하는 ‘권력’이다. 일본과 한국이라는 나라의 ‘경계’를 일찍이 미국이 결정했고(물론 승전국으로서 그랬지만 사실, 미국은일본의 한국 병합도 인정한 나라였다), 현재도 여전히 한일 양국이 미국을 향해 자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는 것도 그 증거 중 하나다.
---「독도 보론 -냉전과 독도 체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