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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누
해설 : 개화 주체의 탄생과 신소설의 길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
李人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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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련이가 피란 갈 때에 모란봉 아래서 부모의 간 곳 모르고 어머니를 부르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난데없는 철환 한 개가 넘어오더니 옥련의 왼편 다리에 박혀 넘어져서 그날 밤을 그 산에서 목숨이 붙어 있었더니, 그 이튿날 일본 적십자 간호수가 보고 야전 병원으로 실어 보내니 군의(軍醫)가 본즉 중상은 아니라. 철환이 다리를 뚫고 나갔는데 군의 말이, 만일 청인의 철환을 맞았으면 철환에 독한 약이 섞인지라 맞은 후에 하룻밤을 지냈으면 독기가 몸에 많이 퍼졌을 터이나, 옥련이가 맞은 철환은 일인의 철환이라 치료하기 대단히 쉽다 하더니, 과연 3주일이 못 되어서 완연히 평일과 같은지라.”
_본문 중에서 (정) “설자야, 네가 옥련이를 말도 가르치고 언문도 잘 가르쳐 주어라. 말이나 알아듣거든 하루바삐 학교에 보내겠다.” (설자) “내가 작은아씨를 가르칠 자격이 되면 이 댁에 와서 종노릇을 하고 있겠습니까.” (정) “너더러 어려운 것을 가르쳐 주라 하는 것이 아니다.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 1년급 독본이나 가르쳐 주라는 말이다. 네 동생같이 알고 잘 가르쳐 다오. 말을 능통히 알기 전에는 집에서 네가 교사 노릇 하여라. 선생 겸 종 겸 어렵겠다. 월급이나 많이 받으려무나.” (설자) “월급은 더 바라지 아니하거니와 연희장(演戱場) 구경이나 자주 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 “설자야, 우리 옥련이 데리고 잡화점에 가서 옥련에게 맞는 부인 양복이나 사서 가지고 목욕집에 가서 옥련이 목욕이나 시키고 조선 복색을 벗기고 양복이나 입혀 보자.” _본문 중에서 옥련이가 구 씨의 권하는 말을 듣고 조선 부인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 씨와 혼인 언약을 맺으니, 구 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獨逸國)과 같이 연방을 삼아서,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 옥련이는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 부인의 지식을 넓혀서 남자에게 압제를 받지 말고 남자와 동등 권리를 찾게 하며, 또 부인도 나라에 유익한 백성이 되고 사회상에 명예 있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마음이라. _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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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 주체의 탄생과 자기 부정의 서사
많은 근대 소설이 ‘가족’의 문제를 다룬다.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 개체가 ‘집 밖’으로 떠날 때만이, 비로소 근대적 개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청전쟁’(1894~1895)의 총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혈의 누》는 평양을 초토화했던 평양회전 직후 뿔뿔이 흩어진 김옥련 가족의 이산과 재회의 서사를 그린다. 부모와 생이별한 일곱 살 여아 옥련은 일본인 군의관 정상(井上, 이노우에)의 구함을 입어 오사카로 보내지는데, 군의관이 전사하자 그의 부인으로부터 다시 한 번 버림받는다. 집 밖에 나서 방황하던 옥련은 우연히 구완서라는 조선인 청년을 만나 함께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워싱턴에 닿아 공부를 하게 되며, 훗날 거기서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 평양에서 오사카, 그리고 요코하마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최종적으로 워싱턴에 이르게 되는 김옥련의 여정은, 정확하게 문명 세계에 이르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김옥련이 ‘집 밖’을 유랑하는 중에 문명 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은,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근대적 개인으로서 자율성을 획득하는 움직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혈의 누》는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것으로 ‘자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근대적 기획과 연동되어 있다. 그러나 《혈의 누》는 ‘청일전쟁’을 ‘일청전쟁’이라 부르는 데서 비롯되는 소설이다. 이인직의 구상은 조선의 식민화를 찬동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가 말하는 과거와의 단절과 새로운 자기 구성이 조선의 자생적인 근대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본의 힘에 의거한 근대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또는 일본인의 도움 없이 《혈의 누》의 서사는 성립하지 않는다. 김옥련의 어머니 최씨 부인을 겁간의 위기에서 구해 준 이도 일본인이며, 김옥련이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도와준 이도 일본 군의관으로 설정되어 있다. 요컨대 《혈의 누》는 개화 주체의 탄생을 그리는 근대 지향적인 소설이지만, 그 정치적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일본을 향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혈의 누》의 근대화 전략은 민족적 허무주의를 노정하고 있기에 문제적일 수밖에 없다. ■ 정본 《혈의 누》 이 책은 1906년 7월 22일부터 같은 해 10월 10일까지 《만세보(萬歲報)》에 연재된 판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일부 오자나 탈자로 의심되는 대목은 광학서포에서 간행된 단행본과 섬세하게 대조해 정본화한 정본 《혈의 누》다. 전북대학교 국문과 이만영 교수(고려대학교 문학박사)가 편집을 책임졌다. 이인직이 친일파라는 사실에 끊임없이 연연하되, 그가 남긴 텍스트를 꼼꼼히 읽어 두는 것. ‘최초의 신소설’이라는 문학사적 평가를 잠시 치워 두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김옥련과 구완서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