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에는 너와 내가 있었다. 남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아, 쓴다.’
오래전 그려왔던 음성이 어른거렸다. 채선은 한자 한자 소리 내어 읊는 것조차 아쉬워, 하얀 손가락으로 활자를 훑어 만졌다. 어쩐지 스승의 체온이 여태 온화하게 깃든 것만 같은 서안. 꾸깃꾸깃, 전하려 했으나 끝내 부쳐지지 못했던 진심.
채선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 소리를 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부리부리한 눈매에 강직하게 쭉 뻗은 콧날, 그리고 시원한 목청을 틔우던 커다란 입매까지. 피식, 웃음이 터졌지만 이내 알 길 없는 쓸쓸함이 뒤따랐다.
재효는 달 언저리에 시선을 두고 노랫소리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보고 지고, 보고 지고, 한양낭군 보고 지고…….”
신재효 너머 으슥한 밤 그림자 밑에… 누군가 쫓아오는 게 보였다. 거리를 두고 조심스레, 쫄래쫄래, 뒤따라 걷는 이는 다름 아닌 채선이었다.
하룻밤 새 두 번이나 낯선 기척을 느낀 재효는 노래와 걸음을 멈추고 채선을 돌아보았다.
“무엇이냐.”
“나… 나으리.”
그저 소박하게 뒤를 따르며 귀동냥이라도 얻을 생각이었건만, 재효가 대뜸 등을 돌려 저를 보니 채선의 말소리는 벌벌 떨리고 가슴속은 쿵쾅쿵쾅 두방망이질 쳤다.
“소… 소리가 좋… 좋습니다.”
“별일이구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재효는 발길을 앞으로 두었다.
채선은 속으로부터 불거져 나온 제 열망에 스스로도 놀라 쭐레쭐레 재효를 쫓아갔다. 물리지 않으시니 따라도 될 성싶었다.
“무슨 소리입니까요?”
“쑥대머리라 하는 거다.”
“아, 쑥대머리.”
보얀 채선이 두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재효를 쫓는 채선은 보폭을 맞추느라 숨이 달리면서도 용케 소리에 대한 감상을 읊는다.
“소리가… 슬프고… 아프고… 그런데… 또… 예쁩니다.”
우뚝, 소녀의 말을 듣던 재효는 처음으로 말간 채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어찌, 슬프고, 아프고, 예쁘다 말하느냐?”
“그러니까… 누군가 밤새 우는 것처럼 슬프고 목이 메어서 아프고… 이제 그만 울어야지 하고 참다가… 눈물이 이슬이 되어… 또옥… 또옥… 또옥… 또옥…….”
아이는 연이어 제 질문을 받아주고 말까지 걸어주는 재효에게 황송하여 더듬더듬, 그러나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어쩌면 동리정사의 대스승께서 나를 받아 주실지도 모르니까.
“풀잎에서 이슬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리가 예쁩니다.”
“아이고, 저러다 사람 잡겄네, 사람 잡겄어. 시방 참말로 저년이 계집인 줄 아무도 몰랐당께요. 나으리께서는 죄가 없지라, 사또!”
세종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장은 날카롭게 재효의 둔부를 내리쳤다.
으헉, 입꼬리를 꽉 깨어 문 재효는 신음소리조차 허투루 내지르지 않았다.
사또는 부아가 치미는지 더욱 야멸차게 태형을 명했다. 형틀 위, 대자로 누운 재효는 매질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 어린 계집년은 나이가 어려 철이 없다 하겠다만, 동리 네놈은 소리 학당의 수장이 아니더냐? 헌데 네 놈이 부리는 소리꾼 중 계집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했다면 그 또한 네놈의 큰 잘못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네놈은 오늘 같은 단옷날 축제에 풍기를 문란히 하고 조선의 기강과 법도를 흐트러트렸다. 이는 태형으로도 끝나지 않을 중차대한 죄이니라. 어찌 과년한 계집이 소리판을 더럽히고 사내들 앞에서 몸을 흔들게 했더냐? 저놈을 매우 쳐라!”
“아이고, 아이고 사또! 참말로 나으리는 몰랐어라. 지가… 지가 그년에게 노래를 시켰어라.”
“시끄럽다. 저놈을 매우 쳐라!”
세종은 목이 쉬어라 자초지종을 떠들었지만 성난 사또는 들은 체도 않았다. 덕분에 재효의 엉덩이는 짓이겨지고 피딱지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갔다.
“아따 이 양반 엉덩이가 남아나지를 않겄다! 옘병, 채석이… 아니지, 채선이 그년은 어디로 내뺀 겨, 엉? 나으리 저 꼴로 만들고 제 년은 속 편허게 어디를 싸돌아댕기고 있는 겨!”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