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의 치병일기 속에 보이는 당대 최고 실력 내의들의 갈등 『정청일기』를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 후반부로 갈수록 허준의 방문은 줄어들고 안덕수와 의약을 의논하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사실이다. 8월 14일에 노수신의 눈 부위가 붓고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정탁鄭琢의 요청으로 양지수, 남응명 등 두 명의 내의가 노수신을 방문한 후 ‘폐열肺熱이 심하고 기운이 울체氣滯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안덕수에게 처방을 묻는 기사가 보인다(1589년 8월 14일) 그 뒤 8월 27일 안덕수는 직접 노수신을 방문하여 문진했다. 안덕수는 이른바 양예수-허준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효과 빠른 약물을 선호하는 준한峻寒 의학에 반대하여 온보溫補의 의학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양예수의 투약 방법은 패도覇道와 같아서 집중적인 투약으로 효과를 빨리 보는 반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지만, 안덕수의 방법은 왕도王道와 같아서 효력이 느리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다. 이에 세론世論은 모두 안덕수를 두둔하였다”는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의약醫藥」). 허준의 방법은 매우 신속하면서 효과적이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반면 안덕수의 처방은 비록 효과는 느리지만 몸을 보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애초에 노쇠한 노수신에게는 비교적 강하고 효과 빠른 허준의 처방 대신, 효과가 느리지만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안덕수의 약물이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기의 짧은 구절 속에서 당시 쌍벽을 이루던 허준과 안덕수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대결을 간취할 수 있다. ---pp.29~30
모친 병환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두 번이나 자른 효자 21일 오후에 병세가 한층 더 위독해졌다. 두 뺨과 손발이 모두 차갑고 코와 입에서 나오는 숨이 차츰 차가워졌다. 또 거의 운명하실 정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께서는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종을 나가게 하고 당숙 어른께서 눈치채고 저지할까 걱정하여 몰래 오른손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는데 첫 번째 자를 때는 피가 나오지 않았고 두 번째 자를 때는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자른 뒤에야 선혈이 나왔는데 세 곳에서 모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또 미음에 타서그릇에 가득 채워 할머니 입안으로 남김없이 부어 드시게 하였다. 얼마 후에 몸에 온기溫氣가 차츰 돌아왔다. 이때 형님이 아랫방에서 쉬고 있다가 아버지가 할머니 입안으로 부어넣을 때에 병상 곁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주사朱砂를 미음에 탄 것인 줄 생각하였다가 두 번째 이렇게 단지를 한 것임을 알고서 마음과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제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몇 해 동안 병을 앓았고 허약한 체력이었는데, 연일 계속하여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날의 정경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은 대변의 맛을 보니 마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썩은 기름 찌꺼기 같다고 하셨다. 인삼 3돈을 넣은 속미음을 드시게 하였다. 양동 숙부님은 흐느껴 울면서 문밖에 나와 장례를 치를 채비를 하였으니, 그 경황이 없음을 예상할 수 있다. ---pp.43~44
사림의 이름으로 처벌하다: 일기에 나타난 유벌儒罰의 사회상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북인 정권의 독주에 반대하다 귀양갔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폐모론에 반대하며 조정을 떠났던 이들도 속속 돌아왔다. 반면 북인 정권에 동참했던 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유배길을 떠났다. 지방에서도 북인 세력으로 활동하거나 북인 세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부린 인사들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각지의 유생들은 유회를 열어 사림의 이름으로 북인 세력을 처벌했다. 예안과 이웃한 안동과 영천에서도 유회를 열어 유벌을 시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영이 사는 예안에서는 1623년 4월 3일 향교 근처 백사장에서 유회를 열었다. “밥을 먹은 후 여희·덕여 등과 함께 대사大寺 앞 백사장에 갔다. 봉사금경·영천수령을 지낸 이영도 등 모인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흉당凶黨을 처벌하여 오윤은 영영삭적하고 (…) 이홍익·윤동로는 삭적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온계에 가서 서긍의 집을 부수게 하였다. (…) 온계의 동구에 이르러 개울가에 앉아 있는데 서긍의 집에서는 몇 리 떨어져 있었다. 사자士子와 품관品官들이 군사들을 시켜 집을 부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부수기가 쉽지 않자 불을 놓아버렸다. 멀리서 보고 있다가 놀라서 힘써 말렸으나 불이 이미 번져서 꺼지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