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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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안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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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56.03MB ? |
ISBN13 | 9791160946062 |
KC인증 |
발행일 | 2020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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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일부 기기 사용 불가),PC(Mac) |
파일/용량 | EPUB(DRM) | 56.03MB ? |
ISBN13 | 97911609460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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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부 곁에 있는 어린이시간이 걸릴 뿐이에요선생님은 공이 무서우세요? 착한 어린이 어린이의 품위 무서운 일 놀이 아니고 놀기 읽고 쓴다는 것 제가 어렸을 때는요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2부 어린이와 나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한 지붕 아래 사는 친구 마음속의 선생님 어린이의 편식, 어른의 편식 선배님 말씀 위로가 됐어요사랑이라고 해도 될까 삶을 선택한다는 것 양말 찾아 가세요 남의 집 어른 3부 세상 속의 어린이저 오늘 생일이다요? 한 명은 작아도 한 명 쉬운 문제 어린이가 ‘있다’ 오해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 내가 바라는 어린이날 길잡이 추천의 글 |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저/ 사계절
2020년 11월 17일
"어린이들이 주인이 되고 어린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존중하는 세계를 꿈꿔본다."
1. 들어가며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를 3주간 연장하여 5월 3일까지 유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2단계나 3주간 연장이 된단다. 다행히 아이들의 학교는 현행대로 유치원인 둘째는 매일 가고, 초3인 딸아니는 3일 등교가 가능해졌다. 다행인 건지, 아니면 더 확산될지 모르니 걱정해야 하는건가. 그래도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니 아이들도 좋고 나도 좋은 것 같다. '학교'라는 공간이 아이들에게 이렇게 소중한 장소였던가 새삼 느끼게 된다. 코로나 이전에 매일 학교갈 때는 '학교 안 갔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바라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학교 좀 제발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바라게 되니 말이다.
학교 가서 친구들을 만나고,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일상이었는지,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던 일상이 이제는 다시 찾고 싶은 잃어버린 우리의 소중한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아마도 '사회적 거리 두기'에 가장 헌신적으로 협조한 집단은 어린이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들은 마음껏 밖에서 뛰어놀지도 못하고 그들의 놀이의 자유를 반납하고 집에서만 보내는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칩거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놀이의 자유를 빼앗아버렸으니 아이들은 점점 더 가상의 유튜브의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는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떠들고 뛰어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아니면 '마인크래프트' 같은 가상의 공간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고양이도, 개도, 말도 마음껏 키우고 수영장도 만들고, 서재도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금 현실에서는 마스크를 항상 끼고, 친구랑 말할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답답한 현실이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어린이는 그 시기에 어디라도 나가서 잠깐이라도 뛰어놀아야 하는 존쟁이다. 그들은 놀이를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 방법, 또래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것 등 교과서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를 배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어린이가 사회를 위해서 무엇을 희생했는지 어른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어른이 주도하고, 주인인 척 군림하며 '어린 것이 몰 알아' 하면서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무시해온 어른들의 세계 속에서 어린이들만의 고유한 세계가 있다고 과감하게 외치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이제는 어린이들의 고유한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어린이들을 존중하자!" 고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세상의 대부분의 책들이 어른들의 생각과 행동을 대변하고 설명해주고 있는데, 이 책은 어린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대변해서 어린이들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어린이들의 이야기'이다. '유연하고 기발한 생각으로 낯선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해 나가는 어린이, 자신을 존중하는 어른을 만났을 때 정중한 태도로 화답하는 어린이, 작은 위험은 기꺼이 감수하면서도 모험을 지키는 어린이, 더없이 다정하게 어른에게 호의를 베푸는 어린이, 어른들의 잘못을 단호하고 명료하게 지적하는 어린이 등 이 어린이들은 특별한 어린이들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자주 흔하게 마주치는 어린이들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성장 모습을 봐도 그렇다. 마냥 아이인 줄 알았던 우리 아이들이 엄마 힘들다며 아이들은 청소기를 돌리고, 청소 밀대로 거실을 뛰어다니다시피 하며 바닥을 닦는다. 그리고 신발정리를 엄마인 나보다 깔끔하고 가진런히 일렬로 잘 정리해놓는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제 이렇게 부쩍 커버린 것일까.' '이렇게 혼자 청소도 신발정리도 척척 하다니 내가 너무 아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래서 나에겐 이 책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우리 아이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어린이들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음을, 그들의 생각과 의견도 어른들만큼 중요하다고, 어린이들은 이제 우리가 보살피고 보호해야하는 존재가 아닌 우리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작은 어른'인 우리의 동반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2. 책 속으로
이 책은 출판사에서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 간 후 일한 후 지금 현재는 독서교실을 열어 어린이들과 책을 읽고 있는 김소영 작가의 어린이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다양한 어린이들의 목소리와 그들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 어른들에게 들려준다.
김소영 작가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p.149)는 어른이다. 또한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 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p.41)는 어른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의 외투를 받아주고, 외투를 손수 입혀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어린이들에게 말한다."선생님이 이렇게 하는 건 네가 언젠가 좋은 곳에 갔을 때 자연스럽게 이런 대접을 받았으면 해서야. 어쩌면 네가 다른사람한테 선생님처럼 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이거 연습해 보자." 그렇게 저자는 어린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어린이와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는 어른인 것이다.
'어린 것이 뭘 알아.' '어른이 말하는 데 왜 자꾸 말대꾸냐.' '어른이 말할 때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이야기를 잘 듣는 거야.' '할 말 있으면 어른 말 끝나고 말을 해.' 라는 소리를 하며 어린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어린이들을 존중해오지 못한 어른들에겐 저자의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어른이 된 우리도 그렇게 어렸을 때 교육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우리 아이들이 내가 하라고 한 일에 대해 '하기 싫어.' 라고 명확하게 자신의 의사 표현하는 것을 볼 때 나 자신조차 깜짝 놀라게 된다. 정말 나 조차도 '라떼는 말이야' 라고 '썰'을 푸는 '꼰대'같은 어른이 되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세상살이에 찌들어서 순수함을 잃어버린 우리 어른들에게 이 책은 신선한 충격이자, 따끔한 질책이자, 새로운 깨달음이기도 했다.
이 책속에서 제시된 일화들 중에서 인상깊었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몇 가지 에피소드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이야기 나누고자 한다.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우리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때 깜짝깜짝 놀라게 된다. 특히 우리 둘째가 커가는 모습은 엄마인 나로서는 대견함이고 기쁨이다. 둘째라 그런지 첫째때보다 성장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못했고, 발달과업 측면에서 볼 때 별다른 어려움없이 자라온 것 같다. 걷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한글을 배우는 것도, 숫자를 배우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고민없이 저절로 다 이루어진 것 같다. 다니던 태권도 학원 관장님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제 국기원에 가서 심사를 받아야 할 실력이라고 말이다. 그저 운동과 놀이 차원으로 다니던 태권도가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이제 검은 띠를 따야할 수준으로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이다. '언제 이렇게 실력이 향상된 것일까.' 그저 운동하라고, 가서 신나게 뛰어놀라고 보낸 태권도였는데, 기특하게도 그런 경지까지 올랐다니 말이다. 그렇게 아이의 성장은 놀랍고 그들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 같다.
이 책에서는 어린이가 신발 끈 매는 것 일화가 나온다. 어린이들은 신발 끈 매는 것을 유독 어려워한다. 어른인 나도 신발 끈을 매도 예쁘고 깔끔하게 매지 못한다. 그러니 어린이는 오죽하겠는가. 신발끈 매는 것을 어려워하는 어린이에게 저자는 말한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끝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거야."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그렇다. 어른과 어른이의 차이는 그것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즉 나중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할 수 있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어느 쪽이 오른쪽 신발일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신발을 신을 때는 신발 뒤축이 구겨지지 않게 손가락으로 당기며 발을 넣었다가 손가락을 신속하게 빼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 어른들은 안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운동화를 빨면 운동화 끈을 다시 매야 하는데, 낑낑거리며, 이 끈은 도대체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야 하지를 고심하면서 열심히 운동화 끈을 매었으나, 막상 신으려고 하면 너무 꽉 매서 발이 안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에는 신발 끈 없는 신기 편한 벨크로나 찍찍이가 대신해서 그런 고민과 걱정을 안해도 되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신발 끈을 매는 방법도, 신발 끈을 운동화에 꿰는 방법을 온몸으로 터득하며 어른이 되었다. 우리 둘째가 신발을 제대로 못 신길래 신발을 내가 신겨주려고 했다. 그 때 우리 둘째가 '엄마! 이거 나 혼자 할 수 있어요!' 라며 나의 도움을 한사코 거절하며 낑낑거리며 드디어 운동화를 제대로 잘 신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해냈다'는 뿌듯함과 기쁨이 어려 있었다. 이 글을 읽으며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나도 이제부터는 아이들을 믿고 기다려줘야 하겠다. 아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다려줘야겠다'고 말이다.
"어린이는 착하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 보니까, 드디어! 필요한 것보다 많이 생산하게 된 거야. 우리 마을에서 다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눠 줘요!"
아이의 대답이 나에겐 참 신선하게 대답했다. 만약 이러한 질문을 우리 어른들에게 했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시장의 발생에 대해 설명하려던 저자 또한 당황했다.
이런 아이에게 경제 논리를 설명하려니 나는 갑자기 속이 시커먼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좀 전까지는 되게 멋있는 어른이었는데, 어린이는 왜 이렇게 착할까 (p.34)
저자는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라고 말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착한 아이병'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아니, 우리 어른들이 아이를 착한 아이병에 걸리게 하는 것 같다. '엄마 말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산타 할아버지는 착한 아이에게 선물을 주신다.' '착한 아이는 ~해야 한단다.' 라고 우리가 무의식 중에 아이들에게 말하고 강요하는 것이 아이로 하여금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면 '착한 아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아직도 학교에는 '모범상'이 존재한다. '모범상'은 어떤 아이들이 받는가? 말 그대로 선생님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 즉 착한 아이가, 착한 학생이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기록부에는 심성이 착하고~착하고 예의바르며~ 등등 착하다는 말이 빼놓지 않고 꼭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착한 아이로 자라야만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교육받고 그렇게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 중에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착해지라고 강요하고 있다. 착하지 않고 나쁘게 살면 인생 망치게 된다고 겁을 주기도 한다. 어제가 세월호 7주기였다. 세월호의 참사 속에서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착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착했기 때문에, 지시 사항이 있을때 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기에,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착해서 그 말만 믿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렸다.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살려달라고' 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소위, 그 말을 듣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간 아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살 수가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 말씀을 안 듣고 뛰쳐나간 '나쁜' 행동을 했는데, 오히려 그 행동이 생명을 구한 '잘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그런 모습을 보았을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해' 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본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만 말하지 않을 거야. 남들의 기준에 따라, 세상이 정해놓은 방식대로 그런 삶을 살라고 말하지 않고 싶어. 너가 하고 싶은 대로,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살라'고 말하고 싶다.
"어린이에게 놀이란?/ 놀기란?
"요즘 아이들은 놀 시간이 없다." "친구가 없다." "게임만 한다." 고 한탄하는 어른들이 많다. '내가 어렸을 때는 밖에 나가서 땀나도록 뛰어다녔는데, 요즘 애들은 도통 놀 줄을 몰라' 라며 어린이들을 비난 아닌 비난을 한다. 하지만 정말 어린이들이 놀 줄은 모르는 걸까. 노는 것을 싫어하게 된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어른들의 어린 시절과 환경이 달라지긴 했어도 어린이들이 놀고 싶어 한다는 사실애는 변함이 없다. 어린이들은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내고 친구를 불러내고 일을 만들어 내면서, 어린이들은 논다. 여전히 어린이들은 노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래서 어린이들을 위한 행사에 '놀자' 라는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모래야 놀자, 그림자야 놀자. 동화야 놀자, 경제야 놀자, 환경아 놀자, 자연과 놀자 등 그런 표현을 단 행사들이 많이 눈에 보인다. 어린이들의 놀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고 그런 어린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일까. 그럼 어린이들에게는 '놀이'는 무엇일까? 놀기는 어떻게 다를까? 저자는 이에 대해 저자는 놀이는 교육적인 내용과 목표에 맞는 것이라고 한다.
'놀이'는 적당한 환경과 도구, 규칙이 갖추어져야 나름 재미있다. 하지만 '놀기'는 예측할 수 없을 때 확실히 더 재미있다. '놀이'는 이 활동을 통한 목적이 있고 교육적 효과와 소득을 예상하고 구성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놀기'는 아무런 소득이 없어도 된다. 일정하게 정해진 규칙이 없이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규칙을 만들고 시행착오를 거쳐 고치고 응용하면 된다. 예상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우승해서 박수도 받아보고, 아까운 패배를 경험하는 것도 모두다 교육적인 것이다.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던 아이와 한 편이 되어 보고, 힘을 합치고, 의욀로 손발이 잘 맞아 가까워지는 의도하지 않은 교육적 효과도 있다.
그러나 요즘은 스마트폰의 보급, 영상매체의 활성화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또래와 놀지 않고 스마트폰하고만 노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린이들은 '놀기'를 통해 건전한 또래 관계를 맺고, 하나의 공동 목표 아래 협동하고, 대안을 모색하면서 배움이 일어나는 데, 스마트폰은 우리 어린이들과 그런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전달하게 되니, 더 나아가 스마트폰에 중독되어버리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언제쯤 어린이들이 스마트폰이 아닌 진정한 또래 관계를 경험하고, 아무런 목적없이 마음껏 즐겁게 뛰어놀 수 있을까. 진정한 놀기를 통해 성정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옛날 TV 예능 프로그램이었던 '슈퍼맨이 돌아왔다' 에서 연예인들 아빠가 아이를 육아하는 모습이 나왔었다. 그때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른 아이들이 이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일까,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지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아~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상황에 있지 못한 아이들이 본다면, 그 가정의 모습을, 그들의 여유있고 부유한 모습에 부러움을 금치 못하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들도 이 쇼를 본다. '세트장'이 아닌, 유명 연예인의 실제 집과 거기 살고 있는 다른 어린이를 본다.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는 어린이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어린이에게는 그 집이 꿈속의 것처럼 크게 보일 것이다. 그 어린이는 어떤 상황에서 TV를 보고 있을까? 누구와 볼까? 부모와 함께 볼까? 혼자 볼까? 무엇을 하면서 볼까? TV가 놓인 곳은 어디일까? 그 어린이는 화면 속 아이를 부러워할까? 자기 현실과 너무 먼 일이라 아무 상관이 없을까?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그들에게는 TV 속 세상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자 또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이런 생각을 전해준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울,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주면 좋겠다. (p.112)
작가의 말처럼, 그렇게 잘 사는 모습, 너무나 레벨 차이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을 TV 화면에 담지 말고,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 아이들은 공감하고 거기에서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 정말 작가의 말처럼,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TV 프로그램이 편성되면 이렇게 소외당하고 절망감을 느끼는 아이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너도 열심히 노력하고 산다면 너도 저렇게 열심히 잘 살 수 있어.' 라고 용기와 희멍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를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p.166)
이에 대해 저자는 자신이 독서교실을 하고 있는데 무료가 아닌 수업료를 받고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돈을 받아서 사랑을 주는 것인데, 그것을 어찌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유료 수업에 사랑을 개입시킬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직업 윤리이다. 또한 저자가 '사랑'을 쓰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저자는 자신이 마음이 많은 것이지 인격이 훌륭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은 어린이를 '이성'으로 가르친다! 어린이 한 명 한명을 존중하고, 그들의 지적 정서적 성장을 돕고, 좋을 때 좋게 헤어지는 것이다. 직업 윤리와 진실한 자세만 있다면 굳이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아도 성과가 있다고 저자는 믿는다고 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부모라고 해서 진심으로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요즘 어린이집에서 보육교사에 의한 아동학대, 아동폭력 사건과 정인이 사건 등을 생각해보게 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 가해자인 그들은 말한다.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훈육의 차원으로 교육의 목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무엇이 교육이고 사랑인 걸까.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돈까지 받으면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또한 저자처럼 '이성'으로도 가르치지도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지금의 아동학대 실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생각처럼 우리 어린이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한 명 한 면 존중받아야 마땅하고, 우리는 그런 아이들의 지적, 정서적 성장을 도와주는 존재인데 어른인 우리가 그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고, 고통을 주는 것일까. 그들이 얼마나 죽을 죄를 지었기에 학대로 죽음에 이르러야만 했을까.' 그러는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잘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금 어른인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엄마인 나는 아이들을 진정 한 명 한 명 인격체로 대하면서 존중해주고 있는 것일까? 엄마라는 이유로 나 또한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인 나를 반성해본다.
사랑은 어른이 어른이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다. 어른도 어른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은 쌍방향으로 흐르면서, 사랑을 주고 받게 된다. 이 책속에서 제시된 일화들 속에서 어른이 저자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른은 마땅히 어린이애게 사랑을 주어야만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어린이에게 사랑을 받을 줄도 몰랐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나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엄마가 줄려고 일부러 하나 남은 거 먹고 싶은 거 참았다고 말하는 둘째, 엄마가 이거 좋아한다며 학교 급식에서 일부러 안 먹고 가지고 왔다는 첫째, 그런 아이들의 사랑에, 마음씀씀이에 격한 감동을 한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가 있었던가. 이 아이들에게는 나는 우주이고, 슈펴 우먼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마냥 기분이 좋아졌다. 어쩌면 내가 아이들보다 사랑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어린이로부터 내 쪽으로, 더 많은 쪽에서 필요한 쪽으로.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내 마음에 사랑이 고여 있을 리가 없다.' (p.175)
"어린이는 어른의 길잡이"
우리 어른들은 '어른은 어린이의 길잡이' 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 아래, 우리 어린이들에게 모범이 되고 길잡이 역할을 해오려고 노력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왜 우리 어른만 어린이에게 길잡이가 되어야만 하는 걸까? 어린이도 어른에게 길잡이가 될 수는 없을까. 그리고 요즘은 어린이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는 어른들의 민낯도 많이 보게 된다. 오히려 어린이들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음과 가르침을 주는 경우도 많다. 우리는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의 갈 길을 정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어른 모두의 몫이 된다. 가정과 학교는 교육의 출발점일 뿐 결국 책임은 어른들 즉 사회가 져야 한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가정에서 보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보고 세상 속에서 배운다.
어린이가 그림을 망쳤을 때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 구겨 버리렴." 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고칠 수 있는지 보고, 안 되면 새 종이를 주고, 다음에는 더 잘 그리도록 격려할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어린이라면 어떻게 할까? 내가 새 종이를 주며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늘어놓기도 전에 어린이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새로운 그림을 시작한다. 그렇게 어린이는 과감하게 미련없이 새롭게 시작할 줄 아는 존재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아까워하지 않고 미련없이,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바로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잘못된 거야. 그러니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해.' 라고 말이다. 이에 반해 우리 어른들은 어떤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결과가 어떨지 알면서도 우리의 욕심 때문에, 미련 때문에, 망설임 때문에 새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는 과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모범이 될 정도로, 아이들이 우리 어른들에게서 보고 배울만큼 '길잡이'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우리가 마스크로 답답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도, 우리 아이들이 코로나 공포를 겼으며 그로 인해 코로나 블루에 고통받고 힘겨워하는 것도 모두 우리 어른들이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잘 못해서 이런 비참하고 불행한 결과가 생긴 것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우리 어른들이 우리 어린이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잘해주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도 우리 어른들이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으로 우리 아이들을 교육하고 이끌수 있도록 적극적 지원과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3. 나가며
이제 곧 5월 5일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작년 어린이날은 코로나 때문에 아무 데도 못 가고 집콕 생활을 했는데 올해 어린이날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다. 아이들이 벌써 '어린이날 방정환'(우리 아이들이 정한 용어 '놀이공원'을 말한다,)을 가자고 난리다. 갈수록 커져가는 코로나 사태 속에서 올해도 집콕 생활을 해야 하는지 벌써부터 아이들에게 미안해진다. 방정환 선생님이 우리 어린이들을 위한 날을 만들었는데, 우리 아이들은 정작 그들의 날인 '어린이날'을 코로나로 인해 마음껏 즐기기 못하고 있다.
어렸을 때 어린이날이 다가오면 듣던 노래가 생각이 난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손잡고 나가자 서로 정답게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이제는 어른이들을 한 명 한 명 인격체로 존중하고, 어린이들 목소리에 하나 하나 귀기울여 듣고, 어린이들이 주인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어 본다.
어린이가 주인이 되고, 세상의 중심이 되는 그런 세상은 없는 것일까. 아직도 어른이가 학대받고 무시당하고, 심지어는 살해 당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어린이들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코로나로 인해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고 이혼가정이 속출하고, 출산률까지 저하되고 있는 우리 현실 속에서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올까? 그리고 우리 젋은 부부들이 마음놓고 아이들을 낳고 키울 수 있는 그런 육아 환경은 갖추어질까?
이 책을 통해서 어린이에게 초점을 맞추고 어린이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할 줄 알고 그만한 능력을 지닌 동등한 인격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 속 어린이들의 경험에 공감하면서, '나도 어렸을 때 그랬었는데' 하면서 맞장구 치면서 즐겁게 오랫만에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나도 '어린이'가 될 수 있었다.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의 인생 선배로서, 좀더 나은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서 어린이들이 존중받고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원하고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우리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낡은 사고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책을 많은 우리 어른들이 읽어보고 우리 어린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기를 바래본다.
주변으로부터 추천을 많이 받은 책이라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끔 했던 책입니다. 평소 소설을 즐겨읽는터라 에세이를 접해본 적이 적은데 '어린이라는 세계' 라는 책은 에세이도 재미있고 교훈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해주었습니다. 평소 어린이들에 대해 좋은 생각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저 자신도 반성하게 되고 '나도 어린이였는데.' 라는 생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책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잊지않고 아이들의 관점에서도 생각하며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어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기도 마찬가지다. 내 인생에서 아기 또는 어린이와 마주할 일이 별로 없기도 했고, 귀엽긴 하지만 떼쓰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대상과 굳이 내 에너지를 들여서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아서 좋아하지 않는단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더 이상 어린이를 만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요즘 어린이들은 어떤지(?), 이 책을 통해서 김소영 작가가 보여주는 '어린이라는 세계'가 어떠한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올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읽을지 모르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잘 읽은 책, 가장 따뜻한 에세이가 아닐까 한다.
어린이책 편집자에서 독서모임 교사로 작가는 다양한 어린이를 만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듯이 어린이들 한 명 한 명도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어른의 눈으로 보여주는 어린이의 모습은 우리가 편협하게 알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부순다. 단순하게 어린이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난 어린이들을 통해 출생률, 노키즈존(또는 노배드패어런츠존), 아동학대, 어린이의 품위 등 다양한 어린이들의 세계를 넘어 사회문제까지 집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에 대한 편협한 시간을 깨줄 뿐만 아니라 나의 어린 시절도 되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을 뿐만 아니라 세상이 각박해서 어린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해야 더 어린이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길 꿈꾸게 만들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