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8년 0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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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37쪽 | 256g | 152*223*20mm |
ISBN13 | 9788989348979 |
ISBN10 | 8989348978 |
발행일 | 2008년 0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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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37쪽 | 256g | 152*223*20mm |
ISBN13 | 9788989348979 |
ISBN10 | 8989348978 |
프롤로그 비독서의 방식들 제1장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제2장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제3장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제4장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담론의 상황들 제1장 사교 생활에서 제2장 선생 앞에서 제3장 작가 앞에서 제4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대처요령 제1장 부끄러워하지 말 것 제2장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제3장 책을 꾸며낼 것 제4장 자기 얘기를 할 것 에필로그 |
대체 왜, 누가, 무엇을 위하여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걸까? 이 책은 진짜 우리가 제목을 읽고 바로 상상하듯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는 방법을 기술적으로 나열한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펴내는 걸까.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세상의 책을 다 읽지 못한다. 다 읽기는 커녕 세상의 책이 백사장의 모래밭이라면 평생 책을 읽는다고 해도 모래 한줌을 손안에 쥔 것 뿐이다. 좀 읽는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특정 시대에 많이 읽히는 책들 혹은 자신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관심 분야 내의 책들을 많이 읽을 뿐이다. 이 책에서 인용한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의 주인공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도서관에 있는 책을 다 읽으려면 1만년은 걸려야 된다.
저자는 책의 제목을 통해 우리 사회의 책 숭배 현상에 대해 날을 해학적으로 세운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터득한 '안읽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읽은 지 꽤 한참(2~3달) 되어 무슨 내용인지 많이 잊어버린 현재 이 책에 대한 나의 상태를 분류해 본다면 '안읽은 책'에 해당된다. 그는 비독서의 범주를 전혀 안읽은 책 외에도 책을 대충 훑어본 것, 사람들이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그리고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까지 포함하여 범위를 넓혔다.
피에르 바야르의 정의에 의하면, 많이 잊어버려 '읽지 않은'의 범주에 해당하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목차를 보면 된다. 전체가 3부로 나뉘어 정리되어 있고, 이것들은 앞서 언급한 비독서의 방식들, 담론의 상황들, 대처요령 이렇게 세 가지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는 개념처럼, 책의 세세한 부분을 읽게 되면, 세상의 모든 책,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지식과 세계관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시간낭비라는 시각이다. 총체적 시각을 갖기 위하여 책들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소적인 지식의 축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진정한 교양의 완전성을 설득한다.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불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자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음으로써,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교양인으로서 가야할 길이라는 것이다.
비독서의 다른 범주로 망각의 독서에 대해 말한다. 읽었으나 잊어버린 책,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책들이 과연 읽은 책이라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읽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어쩔 수 없는 망각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또한 독서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내게 동질감을 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책읽기에 대한 생각도 예리한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가 책을 읽는 동안 잊어버리고, 책을 읽는 것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상황에 따라 다시 손질된 불명확한 기억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에 점점 빠져든다. 점진적이고 체계적인 망각에 의해 그 내용은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하나씩 층발해 나가는 책이라는 것이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판단에 영향을 준 그 담론들과 상상력들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독서는 단지 일시적이고 덧없는 지식을 제공할 뿐, 책과 맺는 관계의 진실성은 책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독서에서 뽑아낸 조각들, 서로 뒤얽혀 있거나 개인적 환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그 조각들을이 내면을 이루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비독서의 유형에 이어 2부에서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을 적고있다. 그것들은 사교 생활에서, 선생 앞에서, 작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하는 상황들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책을 별로 읽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들의 예를 책에서 가져온다. 자 책을 보지 말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방법을 책을 살펴 보며 얘기합시다 라고 하는 책을 써낸 것이다.
사교 생활을 할 때 결코 한 권의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가 우리 내부에 구축한 내면 도서관들,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온 생각들과 의사 교환을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므로 자기 얘기를 하면 된다.
선생 앞에서의 경우다. 서아프리카에 있는 티브족에게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이야기해주는 로라 브래넌이라는 인류학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무척 재미있다.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햄릿의 스토리를 이야기해주자, 유령의 존재를 믿지 않는 티브족은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망자들이 걸어다닌다는 관념을 믿지 않은 채, 이구 동성으로 죽은 이를 통해 형성하는 이야기의 전개에 이의를 제기하고, 결국은 그들과 공통된 하나의 담론 대상을 구성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피에르 바야르는 로라 브래넌이 티브족에게 이야기로 들려주는 책의 조각들이 부재 상태의 책을 대체한다고 보았다. 또한 티브족이 가진 내면의 책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피에르 바야르는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역설적이게도, 텍스트를 전혀 모른다는 점이 티브족으로 하여금 해석 가능한 하나로운 풍요로운 의미를 보다 직접적으로 열게 해준다는 것이다.
작가 앞에서의 경우다. 작가가 쓴 자신의 책과 출판사에서 손 본 책의 내용이 확연히 달라, 독자와 작가간의 소통 불가인 내용의 소설을 예로 들었다. 이 역시 책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여기서 제기하는 문제는 책을 정확하게 기억함에 있어서 과연 작가가 독자보다 더 나은가 라는 것이다. 몽테뉴의 경우의 예로 들었는데, 그는 일단 글을 쓴 뒤 글로부터 분리되고, 그 후에는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작가는 아니지만 이 점에 강력하게 공감한다. 내가 했던 말, 내가 글로 쓴 글이 아주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낯설게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블로그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오래 전에 글쓰기라는 개념도 없이 그냥 끼적 끼적 했던 글조차도 인터넷의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의 내면 세계를 훔쳐보는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작가의 경우, 다른 작품을 구상하고 떠올리려면 그 작품과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조해야 하므로 일관성보다는 다면성이 더 필요한 직업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의 작품에 푹 빠져서 읽고 또 읽고 그것을 자기화한 독자보다도 자신이 쓴 글의 일부 혹은 전부를 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할 때도 책은 우리의 개인적 환상들에 의해 다시 손질된 조각들, 즉 작가들이 쓴 책들과는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첫째, 부끄러워하지 말것, 둘째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셋째, 책을 꾸며낼 것, 넷째 자기 얘기를 할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는 것은 맥락의 중요성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음을 상기하라고 하는데, 그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그 책에 대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담론 게임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평론가와 출판관계자, 속은 베스트셀러라 위상 속에서 그 책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을 말한다.
책을 꾸며내는 것도 상황에 대처하는 하나의 방법인데, 웃기려고 써놓은 같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탈독서가 우리 일상에 만연해있기 때문에 설사 꾸며낸 부분이 부정확함이 발각된다 하더라도 숱한 기억상의 오류들 가운데 어느 하나에 불과하며 속았다고 생각할 위험성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모든 독서에 수반되는 망각을 간과할 떄, 타자가 안다는 생각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참으로 어이가 없다. 그러나 이어지는 다음 주장, 책들에 대한 담론에서 문제의 그 앎이란 불확실한 앎이며, 타자란 우리의 대화 상대들에게 투영된 우리 자신의 불안한 형상이다 라는 점은 다시금 독서 행위와 독서에 수반된 담론의 실체에 대해 결국 독서라는 것이 자아가 만들어내는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사실은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들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런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 205
파블 독서 REVIEW 10-04
"언뜻 보면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값싼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과연 책을 읽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읽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하는 헛된 낭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책과 지식과 진실을 숭상해온 전통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지켜나갈 수 있는가? ... 이 책은 단순히 읽지 않고 말하는 기술에 관한 책이 아니라, 모든 책을 다 읽지 않고도 우리들 삶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지혜에 관한 책이다.
- 책 뒷면, 방민호 문학평론가
이런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다음웹툰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을 통해서인데, 이 웹툰의 진행 형식이 조금 특별하다. 여러 다양한 책을 보여주고 조금은 뜬금 없는 인물들이 나온다. 매일 밤 다양한 웹툰을 보는 나에게는 조금 특이한, 그러면서도 책을 통한다는 게 인상 깊었다.
* * *
처음 이 책을 들고 읽기 시작했을 땐, 수월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우선 번역투의 문장이 읽는 호흡을 끊게 만드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나는 외국 서적을 읽을 때마다 사람 이름을 곧잘 헷갈려 하기도 하니, 이 안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확인하러 재차 앞 페이지로 돌아와야 했다.
- 번역된 책이니 직역이 있는 건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하고 이름을 못 외우는 건 순전히 내 탓이다;
<강원국의 글쓰기>나 다양한 독서법, 글쓰기법 관련한 책을 보면, 대부분이 목차를 먼저 읽는다고 한다. 나도 그 버릇을 닮아 보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의 목차는 너무 단순해서 목차만으로도 이 책을 다 읽은 것처럼 느껴졌다.(이 책의 제목처럼 말이다!)
* 비독서의 방식들-에서는 비독서에도 다양한 지점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혀 읽지 않았거나 대충 훑어봤거나, 책 얘기를 들은 경우, 그리고 읽었지만 잊어버린 경우.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든 방식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나는 읽고도 까먹은 내용들이 허다하다. 그러면서 한 번씩 또 꺼내 읽는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 담론의 상황들-에서는 누구와 함께 그 책 이야기를 할 때,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해서다.
* 대처요령-에서는 말 그대로 그에 따른 대처 요령들이다.
이 책의 매력은 단순하게 글을 개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저 작가의 목소리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양한 책들에서 비독서의 형태를 끌어왔다. 그러니 재미있을 수밖에... 게다가 작가 자신이 그 책을 인용하면서 대충 읽은 것인지, 까먹은 책인지, 그저 들은 책인지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밝힌다.
이러한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글은 이 리뷰의 맨 앞에 적은 방민호 문학평론가의 말이다.
이 책은 당신에게 안 읽은 책을 읽은 것처럼 만들어주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상식적, 교양의 산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책들을 꼼꼼하게 읽지 않아도 우리는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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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다양한 책을 읽고 그에 따른 짧은 비평을 하는 과제나, 그 수업에서 어떤 작품을 읽어내고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찾는 게 일 아닌 일이었다. 나는 독서광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당연히 읽히는 작품들이 나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물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면서 그 내용의 아웃라인을 알게 되었고 서서히 내 비평에도 그 글의 어떤 부분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이미 나는 경험을 통해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간혹 누군가의 책을 꼼꼼하게 읽고 그에 따른 비평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땐 조금 괴로웠다. 그 책의 내용을 그 비평가의 내용 바깥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답이라는 걸 찾았으니 내 뇌가 움직이지 않는 기분이랄까?
이 책의 중심에는 다양한 관점을 가지라는 말이 깔려있다. 책을 다 읽는다고 해서 그 책을 전부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의외로 다 읽음으로 인해 생각의 정지를 겪을 수도 있다. 게다가 책이 교양이며, 그 사람의 교양을 나타낸다는 위험한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에서, 읽은 책이건 읽지 않은 책이건 책들은 일종의 2차 언어를 형성하며, 우리는 이 언어에 의거하여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 우리를 나타내고 그들과 소통한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책들은 간추리거나 다시 손질한 발췌문들에 의해 우리 개성의 부족한 요소들을 제공하고 우리의 결함들을 메우면서 우리를 표현하고 우리를 보완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p172-173, 부끄러워하지 말 것 中
김영하의 북클럽 6월 선정 도서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어 보았다.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북클럽에서 선정한 책 제목이 너무 얄궂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지만 많이 읽지도 그렇다고 완벽하게 읽지도 못하니 책을 안 읽고 어떻게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지 그 방법이 나도 궁금했다.
작가의 말처럼 지금의 사회 분위기는 독서가 신성시되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금기에 가까우며 이것을 타인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또한 정독하지 않으면 눈총을 받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해야 할 상황은 어쩌면 공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이러저러한 상황 속에서 어쩌면 위기라 할 수 있는 이 순간에 꼭 그 책을 정독하지 않아도 읽지 않아도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을 지속적해서 이야기한다. 책 속에 담긴 텍스트는 개개인의 내면의 도서관과 만나 각자의 해석으로 다시 내면의 도서관에 담기기에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 다 같은 텍스트를 내면의 도서관에 담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책을 읽지 않아도 자신이 가진 내면의 도서관을 이용해 충분히 책에 대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또한 독서가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너무 책에 몰입한 독서는 오히려 책을 안 읽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경우들도 있다. 책을 읽고 자신만의 도서관에 담아두지 못하고 책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책을 읽지 않아도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경우에도 책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환경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한데 발레리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각각의 책 앞에서도 동일한 태도를 채택하여, 그 책에 대한 전체적 시각-이는 책들 전체에 대한 시각과 연관되어 있다-을 갖도록 부추긴다. 이러한 관점의 추구는 책의 어떤 대목에 빠져 길을 잃지 않고 책과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만 가능 하며, 그래야만 책의 참된 의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p.57)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살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그런 괴로운 상황들에서 빠져나갈 효율적인 전략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소득으로서의 독서보다는 상실로서의 독서-책을 대충 훑어보기만 했거나, 소문으로만 들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데 따른-라는 관념이 매우 중요한 심리적 원군이 된다. (p.89)
이 내면의 책은 앞에서 말한 ‘탈(脫)독서’와 더불어 책에 관한 담론 공간을 불연속적이고 이질적인 것으로 만든다.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 무관한-물론 물질적으로는 우리가 손에 잡았던 바로 그 책과 같은 책이겠지만-,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인 것이다. (p.122)
내용 역시 안정된 것이 아니며 책에 대한 의견 교환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상당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텍스트의 이러한 유동성을 불편 사항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동성은 누구든 그것을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책의 창작자가 될 절호의 기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p.197~198)
어떤 말이나 글의 맥락에 맞춰 적절한 책을 꾸며내는 일은 거기에 주체의 진실이 더 많이 실릴수록 그리고 그것이 그의 내면세계의 연장 선상에서 기술될수록 그만큼 더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다. (p.230)
이 책 또한 김영하의 북클럽이 아니면 만나보지 못했을 책 중의 하나이다. 제목도 그렇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되지 않았고 작가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 책을 덮는 게 맞는 게 아닌가하며 고비에 고비를 넘긴 책이다.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작가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처럼 나 또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 두렵고 그 책을 읽지 않은 것 자체도 뭔가 할 일을 안 한 듯한 기분이 들기에 더 책에 집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그리고 책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실생활에 자신의 깊이를 담아내지 못한다면 책을 읽었어도 무용지물일 것이다. 나름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 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솔선수범해 인간다움을 베푸는 사람들을 통해 매번 반성하기에 독서가 곧 인간다움의 실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서가 우리 삶과 사회에 더욱 보탬이 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되기 위해서 독서가가 먼저 바른 삶을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 또한 우리 독서가들의 몫이라 생각된다. 두껍지 않은 책인데 책이 수월하게 읽히지 않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빈번히 등장하는 하이픈(-) 속의 설명이었다. 이 하이픈의 등장으로 인해 주 내용에서 다른 길로 이탈하는 경험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헤매는 와중에 비독서도 중요하다고 하니 이 책을 읽지 않는 게 오히려 맞는 게 아닌지 아니면 대충 봐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놀라운 책이었다.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정독하지 않아도 작가 피에르 바야르가 섭섭하진 않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