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의 배경이 된 시대에는 돈 대신 인육으로 갚는 계약도 사회적으로 인정됐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 사람을 노예로 사고팔기도 했으니 신체의 일부를 베어서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샤일록은 안토니오가 나중에 두 배로 갚겠다고 하는 등 여러 제안을 했는데도 개인적인 앙심 때문에 살을 베려 했고, 샤일록의 이런 태도는 당시의 기
준으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샤일록에게 적용한 것이 ‘시카네(Schikane) 금지의 원칙’입니다. 남을 해치려는 목적이 있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개념은 더욱 발달하여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 pp.30~31
“민법상 물건으로 취급되는 것들 중에는 생명을 가진 존재도 있습니다. 개, 고양이 같은 동물이 그렇고, 산과 밭에서 자라나는 식물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물건이라고 하기에 못마땅한 면이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주문한 물건을 택배로 받듯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동물을 박스에 받아 택배로 받는 것은 언짢습니다. 실제로 배송 중에 눌려 죽는 동물도 굉장히 많습니다. 또 공장에서 물건을 많이 생산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종견장의 개가 평생 임신과 출산만 하며 개를 ‘생산’하다가 마지막엔 보신탕이 되고 마는 현실을 보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민법은 동물을 물건으로 취급해야 할까요?”
--- p.40
“민호와 다솜이처럼 혼인을 한 미성년자는 성년에 달한 것으로 보아 행위 능력이 인정되고, 부모의 동의 없이 독자적으로 계약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성년 의제라고 합니다. ‘결혼하면 어른 대접을 해
줘야 한다.’는 옛말처럼 미성년자라 해도 혼인을 하면 성년이 되었다고 보고 독립적으로 혼인과 가족생활을 꾸려 갈 수 있도록 해 놓은 제도입니다. 이혼한다고 해도 성년 의제의 효력은 계속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취지와 관계없는 공직 선거법이나 근로 기준법 등의 법률은 혼인을 했다 해도 여전히 미성년자로 받아들입니다.”
--- p.139
“근대 민법에는 당시 사람들의 인간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오직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다른 사람과 대립하는 존재’로 전제하지요. 그래서 개인의 의사와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적 자치의 원칙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만 앞세워서는 다른 사람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가 중요해졌고, 이것을 다시 민법에 반영하게 되었지요. 오늘날의 민법은 개인의 권리만 생각하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점차 바뀌고 있습니다.”
--- pp.174~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