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2년 12월 31일 |
---|---|
쪽수, 무게, 크기 | 408쪽 | 153*224*30mm |
ISBN13 | 9788931004021 |
ISBN10 | 8931004028 |
발행일 | 2002년 12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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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08쪽 | 153*224*30mm |
ISBN13 | 9788931004021 |
ISBN10 | 8931004028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호라티우스 〈시학〉 플라톤 〈시론〉 롱기누스 〈숭고에 관하여〉 |
시학을 보면서 그리스 시대가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들었던 노래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논쟁들
어렵고 낯 설은 단어들이 많이 나와 몇번이고 멈췄지만 그래도 즐겁게 보아 왔다.
죽기전에 꼭 한번 읽어보려고 했던 책을 다 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 ^^
다만 전공서적 같다.
그냥 처음 접하기에는 어려운 내용도 많이 있고 접근하기도 어려운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의 형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의 형태는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개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압축의 언어를 시라고 부른다. 운율이 있고, 상징이 있고, 이야기가 있는 것이 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는, 활자로 찍혀있는 책 속의 언어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는 서사시 뿐만 아니라 희극이나 비극처럼
배우가 있고 관객이 있는 문학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시대와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말하는
詩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에 놀랐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많은 것을 정의내리고 있다.
다양한 문학작품을 인용하고 있으며, 훌륭한 시가 필요로 하는 플롯과 성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체의 형체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극히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는 보고 쾌감을 느낀다.
- 35p 아리스토텔레스《시학》중에서
호라티우스는 타고난 재능과 숙련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시의 핵심이 사상인지 형식인지, 또는 시의 목적이 교훈인지 쾌감인지 하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후반부에는 시인의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장의 구분 없이 서간체로 이어져 있어 보다 쉽게 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만일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것이다>라고 말일세.
- 226p 플라톤《시학》중에서
플라톤은 말 할 것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보다 더 빠르게 읽혔다.
예술을 '세 종류의 침대'로 비유했는데, 이 부분에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신이 만든 불변의 침대와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
화가나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이렇게 세 종류의 침대를 바탕으로 시인과 시인의 언어를
국가에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정의 내리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호라티우스는 시의 근본에 대해 이야기 했다.
좋은 시란 무엇이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쪼개고 분해하여 각 성질을 정의내린 반면
플라톤은 시와 시인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며 '국가에 필요없는 것'으로 정의내렸다.
서사시 뿐만 아니라 희극이나 비극처럼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일반 예술을
모두 '시'라는 장르로 함께 분류했던 당시,
플라톤이 거부했던 시의 존재가 사뭇 무겁게 다가왔다.
《피네우스의 딸들》에서 이 여인들이 그 장소를 보자,
전에도 그곳에서 버림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들의 운명을 추리한 것은
모두 발견의 근거가 되었다.
- 93p 아리스토텔레스《시학》중에서
시학에 인용된 많은 책들 가운데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이 바로
《피네우스의 딸들》이다. '발견의 근거'가 상당히 시적으로 표현되었다.
'그곳에서 버림받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라는 부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저 인용문 하나만으로도 한 편의 시가 되고, 압축의 언어가 되었다.
불행한 기억의 한 대목을 '발견의 근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누구 말처럼 어려운 책을 읽으면 뇌 세포가 팡팡 터지는 기분이다 ^ㅡ^
즐겁게 잘 일었다!
헌책방에서 득템한 책이라 더 뜻깊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은 내용만큼이나 낡은 겉 모습 또한 상당히 멋지다.
오래된 책은 이렇게 '책 배'가 빳빳하게 굳는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거짓말을 조금 더 보태면 낙엽 밝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_+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라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낡은 표지와 낡은 책 배가 너무 멋지다.
시학을 1500원에 읽는다면 믿겠는가.
신촌에 있는 '숨어있는 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1500원이면 만날 수 있고,
호라티우스를 1500원에 만날 수 있으며,
플라톤을 1500원에 만날 수 있다.
헌책방에선 이렇게 즐거운 보물찾기가 가능하다 ^ㅡ^
접어 놓은 페이지가 많을 수록 독서는 즐거워진다.
마치 스스로에게 '나는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라고 끊임없이 증명하는 기분이다.
또한 책을 쓴 작가에게도 허투루 읽고 있지 않다는 성의를 표시해야 할 것만 같으니까.
물른 밑줄은 필수다.
2012년 2월 3일 읽음 :D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같은 책이지만 제가 읽은 책은 80년대 출간된 책입니다 ^ㅡ^내용에 큰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문예비평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예비평가의 문학론에 따라 당대의 문학작품을 비평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정의는 이 책에 있는 네 가지 문예비평서에 비추어본다면, 그다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문예비평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 플라톤의 『시론』,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 중에서 가장 우수하고 체계적이라고 평을 듣는 것은 단연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플롯'과 '카타르시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르면, 서사시, 비극, 희극 중 가장 우수한 모방은 비극이며,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플롯, 즉 줄거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모방의 줄거리가 우수하고 뛰어나야만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 따라야 하는 걸까? 비극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플롯일까? 그가 『시학』에서 극찬한 『오이디푸스 왕』을 보자. 이 비극은 줄거리도, 발견의 방식도, 모방도 모두 완벽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작품이 고전으로 남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 작품의 기법이 아닐까? 『오이디푸스 왕』이 처음 아테네인들에게 선보여졌을 때는, 그것이 낭독되고 연극으로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만약 『오이디푸스 왕』이 읽혀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 때는 카타르시스보다 작품의 주제와 깨달음이 훨씬 더 우선시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밝혔듯이, 감정은 종종 우리를 속이기 마련이다.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카타르시스가 이성까지 감동으로 적실 수는 없다. 『오이디푸스 왕』이 살아남은 이유는 작품의 플롯과 카타르시스뿐만이 아니다. 그 작품의 주제와 깨달음 때문에 『오이디푸스 왕』은 인문고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현대 문예비평서의 모든 기초가 되고 있다. 예컨대, 코로스나 조사를 서술하는 경우를 보자. 그런 것은 연극을 하려는 사람, 그리스인 희곡작가에게 커다란 도움이 된다. 그리고 번역됨에 따라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이것이다. 모든 모방되는 이야기는 그것만의 줄거리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하여 독자가 감동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개하는 '발견'은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된다. '기계 장치 또는 시인에 의한 발견'보다는 '기억에 의한 발견'이 낫고, 그것보다 '추론에 의한 발견'이 나으며, 궁극적으로 '이야기 자체에 의한 발견'이 가장 뛰어난 발견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분명히 지금도 재해석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외에도 호라티우스의 『시학』,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 등의 작품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보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그것의 토대가 되었으며, 작품성과 문체 역시 부족하기 때문이다. 누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굴복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