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탐구》 머리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책을, 광대한 사고 영역을 종횡무진으로, 모든 방향으로 편력하는 얽히고설킨 긴 여행에서 생겨난 다수의 풍경 스케치들을 담고 있는 하나의 앨범에 비유했다. 거기에 실려 있는 그림들을 어떤 식으로 배열하고 종종 가위질하면,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하나의 풍경 사진을 줄 수 있는 앨범. 이러한 비유는 그 책뿐 아니라 그의 나머지 글들 대부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연구들은 기본적으로, 그가 남긴 사고 여행의 앨범 또는 앨범들로부터 그가 말한 방식에 따라 그가 본 풍경들을 재현해 보려는 이런저런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틈새 없이 하나로 이어진 활동사진과 같은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와 같은 것을 만들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그의 사고 경향에 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다만 그의 여행에서 핵심을 이루는 지점들이라고 여겨지는 곳들을 선택적으로 클로즈업하여 살펴보면서 그의 여행이 지향했던 바를 나름대로 조망해 보려 애썼다.
--- p.10~11
주지하다시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20세기의 강력한 철학 사조인 분석철학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전기 철학은 논리실증주의에, 후기 철학은 일상언어학파에 영감과 영향을 주었다. 분석철학에서 논의되는 많은 주제들에서 그의 관점은 지금도 생명력과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분석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되곤 한다.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은 분석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또는 적어도 그런 인물들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를 이러한 틀 속에서만 파악하려 한다면 잘못이다. 《논고》와 논리실증주의 사이에 중대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 분명해졌다. 그 둘은 논리와 언어, 그리고 과학의 본성에 대한 탐구에 몰두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가 논리와 과학을 넘어서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데 반해, 《논고》는 오히려 논리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윤리·종교·예술)에 중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논고》 역시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러나 《논고》가 염두에 둔 형이상학의 문제는 논리실증주의의 믿음처럼 종교-신학적인 사고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 사고로부터 오는 어떤 것이었다.
--- p.47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여기서 언급된 해방의 실제적 전망에 대해 대체로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깨달음 자체에 대한 확신의 결여가 아니라, 소승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던 그의 전기의 관점으로부터 대승적이라고 할 수 있는 후기의 관점으로의 전환 결과 얻게 된 현실 인식의 자연스러운 표출일 것이다. 즉 해방은 가능하지만, 단지 자아의 변화 의지에 머물지 않고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변화와 관계되는 (문화적 차원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실천적 작업의 방대함과 더불어 끝없이 요구될 노력과 인내심의 정도를 생각하면, 그 누구도 결코 철학의 종언을 경솔하게 운위(云謂)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설사 ‘내가 원할 때 나로 하여금 철학하기를 그만두도록 할 수 있게 만들어’ 줄 만큼의 완전한 명료성 또는 치료 방법들이 발견되었다 해도 그 방법들의 실제 적용, 또는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오성(悟性)에 걸린 마법에 대한 하나의 투쟁’(PU §109)은 결코 단번에 또는 저절로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마치, 세상의 온갖 질병들에 대한 치료법들이 개발되었다고 바로 그 질병들이 저절로 다 없어지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 p.84~85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신체는 인간 영혼의 가장 좋은 그림이다”(PU 2부)라고 말한 바 있다. 비슷하게, “낱말의 사용은 낱말의 의미의 가장 좋은 그림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낱말의 의미는 바로 낱말의 사용에서 그 얼굴이 그려진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상, 즉 관상이 된다는 것이다.
--- p.232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마음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문제들은, 다른 철학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표현들?이 경우는 심리학적 표현들?에 대한 문법적 착각 내지 오용에서 비롯된다. 즉 그 문제들은 마음의 숨겨져 있는 어떤 본성 때문에 발생한다기보다는, 관련 표현들의 올바른 사용을 일목요연하게 보지 못하는 데서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깊이 숨겨져 있어서 그것에 대한 발견이나 확인, 이론적 설명 따위가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문제는 오히려, 마음과 관련해 우리를 철학적 곤경, 철학적 파리통에 갇히게 한 철학자들의 언어 사용(오용)이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그러한 언어 사용(오용)으로부터 본래의 사용으로 돌아갈 길에 대한 통찰이다. 즉 우리가 어떤 길을 거쳐 문제의 철학적 파리통으로 빠져든 파리 신세가 되었는지를 상기해 냄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날 길을 훤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지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지도는 심리학적 개념들의 연관 관계를 보여 주는 문법적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 p.265
그의 작품은 윤리적인 모든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고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의 한계를 명확히 확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윤리(학)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한 윤리적인 것들에 대해 침묵한 것은, 그가 쓸 수도 있었던 것을 어떤 이유에선가 쓰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만일 그가 침묵하지 않고 뭔가를 썼다면, 그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라 단지 ‘허투루 지껄이는’ 것에 불과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즉 그는 그것들이 본래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윤리적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단순히 도덕적 ‘선(善)’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LE 26쪽)로 이해된다.
--- p.342
철학사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철학의 이른바 ‘언어적 전환’을 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언어적 전환은 비트겐슈타인 혼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또 분석철학의 전유물인 것도 아니다. (가령, 해석학적 철학 역시 언어적 전환의 또 한 형태를 이룬다.) 그러나 하버마스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근대의 의식 중심의 철학 패러다임이 언어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분명하게 전환된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의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언어비판은, 언어의 본성에 대한 고찰을 통해 유의미한 언어 사용의 한계를 드러내고 언어의 월권적 사용(오용)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성의 확장이 아니라 한계 해명을 목표로 한 칸트의 이성비판과 그 발상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후자가 어디까지나 가능한 지식과 단순한 사변의 구분을 위한 인식론적 정초 작업으로서, 또 체계적인 학이어야 할 형이상학을 위한 예비학(존재론)으로서 간주되었던 점에서, 그것은 전자와 중요하게 구별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비판은 결코 이론적 학을 지향하는 인식론적-존재론적 정초 작업이 아니다.
--- p.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