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 다른 사람 _007
니꼴라 유치원 - 귀한 사람 _043 괜찮은 사람 _079 벌레들 _107 당신을 닮은 노래 _137 방 _165 눈사람 _193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 _221 해설 | 황현경(문학평론가) 모르는 사람 _255 작가의 말 _273 |
괜찮지 않은 사람들
도서3팀 박숙경(beblue84@yes24.com)
2017.01.19.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책을 뽑아든 건 순전히 저 부분 때문이었다. 이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신하고 있다는 걸까. 아니면 괜찮은 사람이든 아니든, 남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따위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인걸까. 어느 쪽이든 부럽구나,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로 짐작해 보건데 아마도 이 이야기들에서 괜찮은 사람이 등장할 리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나는 어떤 '괜찮은' 사람을 보고싶었던 건지. (사족이지만 덧붙이자면 저 '괜찮은'의 맥락을 'nice'로 짐작했던게 분명한 나에게 이 여덟 편의 이야기는, 정말 여러가지로 의외의 연속이었다.) '호수 - 다른 사람'의 진영은 의식이 없는 채 누워있는 친구의 연인이, 친구에게 충실했던 과거의 평판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에 불안을 느낀다. 과거 사귀던 사람에게 목을 졸렸던 경험이 있는 주인공의 불안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것이 친구의 이야기인지 그녀 자신의 이야기인지에 대한 경계를 흐트러뜨린다. 남자가 암시하는 폭력성은 진영의 경험과 겹쳐지며 자신이 경험했던 폭력의 주체와 친구를 덮친 괴한이, 그리고 친구의 연인인 남자가 모두 '다른 사람'인가에 대한 확신은 엷어진다. 여기서 여성 독자인 내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른다고 의심이 되는 남자와 단 둘이 호숫가를 걷고 있는 화자의 객관적인 상태에서 오는 불안에 동요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의 불안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여자의 위기감에서만 오지 않는다. 나의 경험일까, 친구의 경험일까? 친구의 연인은 친구에게 정말 폭력을 휘둘렀을까? 친구가 의식을 잃기 전 했던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호수 밑바닥에서 찾아낸 건-그 길고 얇은 물건은 과연 무엇일까? 이 끊임없는 의문들. 섣불리 답을 말할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 형체를 가진 이 의문들은 점점 이야기에 가속을 붙이며 읽는 이를 불안하게 한다. 표제작인 '괜찮은 사람'에서 화자가 겪고 있는 폭력-혹은 폭력적인 상황- 역시 모호하긴 마찬가지이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는, 불의의 '사고'로 계단에서 약혼자에게 밀쳐졌다. 아마도 실수일 게 분명하다고 믿고싶은 이 상황에, 나와 약혼자가 결혼 후 살게 될 집을 보러 가는 길에 겪는 불길한 징조들이 층층이 쌓이며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의도된 폭력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봄, 그녀는 그와 결혼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했던 그 무수한 안간힘 중 가장 노력해야 할 일이 될테다. 무지하다는 것. 내가 현재 겪고 있는 것을 단순히 현상으로만 파악할 수 없을 때 불안은 시작된다. 그 너머에 어떤 의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는 데서 오는 불안. 공포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불안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이 소설들은 그 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독자를 추궁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 불안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되면 상황은 개선되는가.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한 순간의 폭발로 세상이 동시에 암흑이 되는 비극 보다는, 조금씩 온도가 오르는 컵 안의 물에 잠긴 개구리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닮은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하기 보다 자신의 괜찮지 않음을 들키지 않으려는 쪽을 택한다. 아마 읽는 이조차도 누가 '괜찮은 사람'인지 알 수 없을 이 소설집의 끝에는, 그래서 결코 괜찮아질 수 없는 사람들만이 남는다. |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와 같이 걸어가기 싫었다. 나는 혼자 빠르게 걸었다. 그가 뒤처졌다. 문득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나보다 앞세워 걸었어야 했다. 그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고, 내가 그걸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했다. ---「호수」중에서
나는 그저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이 빈약하고 허름한 트랙에서조차 떨어져나갈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불안은 순식간에 번지는 곰팡이와 같아서 쉽게 눈에 띄었고, 그러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괜찮은 사람」중에서 예연은 ‘우리 세 사람’이 가깝게 지내기를 원하는 동시에 그녀 자신이 희진과 나 각자에게 ‘더 친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예연 앞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주고받던 농담이나 장난을 멈추는 건 물론이고, 대화도 삼갔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자 희진이 먼저 짜증을 냈다. 어떻게 해서든 예연의 꼬투리를 잡아보자고 했다. 나는 좋았다. 셋이 함께. 그것도 충분히 좋았지만, 나 역시 그중 어느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희진에게 조금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벌레들」중에서 내 자궁을 적출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던 날, 엄마는 특별히 어떤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가 많이 당황해 있어서 엄마라도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괜찮아’라고 여러 번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젊어, 너는 회복이 빠를 거야. 너는. 내 새끼, 너는 날 닮았으니까. ---「당신을 닮은 노래」중에서 모든 일에 이렇게 분명한 지도가 있었다면, 그들은 헤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녀를 오직 화가 잔뜩 난 얼굴로만 기억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글쎄, 어쩌면 지도는 늘 분명했을지 모른다. 다만 잘 읽지 못했을 뿐.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중에서 |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멍청한 여자들에 대해 들어왔다.
위험한 남자들보다, 멍청한 여자들에 대한 경고를 더 많이 들어왔다.” 불안의 선율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신예, 강화길 첫 소설집! 태평성대에 사람들은 목가를 부른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망가졌는지도 모르게 천천히 스러져가는 세계,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웅크린 채 끝을 노래하는 사람들. 편안한 소진[安盡]의 노래. 절망이 희망보다 안락하고 희망이 절망보다 불안하다면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바로 그 안락을 뒤흔드는 힘이 강화길 소설에는 있다. 그것을 읽으며 우리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들의 불안이 전염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왜 너는 병들었는데 아프지 않으냐는 질문이 더 아프다. 서서히 모로 눕는 배에서 가장 먼저 불안에 떠는 것은 쥐떼가 아니라 작가들이다. 환멸과 허무와 도피와 무시와 냉소와 분노가 다 지나간 후, 이제 뭔가가 다시 시작되었다. _황현경(문학평론가) 독자의 시야를 가림으로써 구현되는 ‘여성’ 스릴러 일상에서 감지되는 불안의 기원을 천착하는 신인작가 강화길의 첫 소설집 『괜찮은 사람』이 출간되었다. 그는 201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할 당시 심사를 맡았던 소설가 황석영, 최인석으로부터 “꾸밈없이, 흔들리지 않고 인물과 주제를 탐구해”나가는 작가라는 평가를 이끌어냈다. 갓 작품활동을 시작한 시점에 이미 “주제를 장악하는 힘”을 내재하고 있었던 믿음직한 소설가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후 강화길은 그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86년생 여성으로 살아오며 느꼈던 모종의 불안감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가상현실’로서 자신의 소설세계를 구축하는 중이다. 그런 만큼 이 책에 수록된 8편의 소설 속 장면들은 동시대 여성의 일상 경험과 맞닿아 있다. 밤늦은 귀갓길, 뒤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위협적인 기척이라거나 좀처럼 실체를 확인할 수 없지만 어느새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본인에 대한 소문, 통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저항을 포기한 채, 눈을 감고 입을 다무는 무기력한 순간 같은 것 말이다. 강화길은 주로 스릴러의 문법을 활용하여 이러한 경험들을 소설화하는데, 이 장르가 소설 속에 형성된 불안감을 추체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하다. 직접 느껴왔던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강화길은 ‘믿을 수 없는 화자’를 설정하는 장기를 발휘한다. 문학평론가 황현경은 이 소설집의 해설에서 “뭔가 더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놓치고 있다는 직감, 불안은 그로부터 시작된다”는 강화길 소설의 스타일을 정확하게 짚어냈다. 1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독자가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맹점, 즉 화자의 주관적 서술로 인해 상황을 전지全知할 수 없다는 한계는 화자의 불안감을 야기하는 다른 인물들이 미처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지 못한 이면의 사건을 짐작해보게 한다. 화자의 서술이 뭔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독자는 지금껏 소설 속에 설치되어 있던 정교한 함정에 무심코 빠져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지금까지 화자에게 습관적으로 보내왔던 신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인식 전환의 순간 분출되는 쾌감은 강화길 소설이 선사하는 독서의 묘미이기도 하다. 이 소설들이 정교하게 파놓은 함정에 빠져들며 비로소 실감되는 것은 명징하지 않기에 더욱 위험한, 타자他者에의 폭력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니꼴라 유치원―귀한 사람」은 아들을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백방으로 노력하는 여성 ‘나’를 화자로 내세운다. 내 아이가 뭔가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면 기분이 좋고, 그것을 더욱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은 부모로서는 응당 가질 만한 것이므로, ‘나’는 아들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주변 여자들의 시기와 폭력적인 시선을 애써 무시한다. 그녀의 과한 교육열이 아들을 혹사시킨다는 소문은 다른 애엄마들의 질투에 의해 퍼진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일축해버리면서. 하지만 사실 ‘나’가 어린 시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데 대한 비틀린 열등감을 감추고 있었음이 드러나자, 아들에게 거는 ‘나’의 기대가 과연 정상적인 것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아들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아이를 ‘귀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것인가, 스스로 ‘귀한 사람’이 되려는 것인가. 이렇듯 타인에게(혹은 독자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받기 위해 상황을 왜곡하여 들려주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이 부디 ‘괜찮은 사람’이기를 공포에 떨며 바라고 있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강화길은 부수적인 사건들을 통해서라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의식적/무의식적 폭력을 작품 속에 드러내왔는데, 특히 남성의 폭력은 그녀들에게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더욱 도드라져 읽힌다. 「벌레들」과 「눈사람」에는 여자친구/아내에 대한 남성의 신체적 학대가 그려져 있으며, 「굴 말리크가 기억하는 것」에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소연하는 여동생 ‘타니 칸’에게 쏟아지는 오빠의 무자비한 구타는 아직도 몇몇 국가에서 공공연히 행해지는 명예 살인을 떠올리게 한다. 「방」에서 ‘재인’의 하루 일당을 손에 쥔 채 그녀를 희롱하려는 팀장의 행위는 직장 내 성폭력으로도 읽힌다. 「당신을 닮은 노래」 중 한 장면, 운전을 하는 여성 화자 ‘수진’에게 내뱉어지는 남성 운전자의 욕설 또한 여성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주 들어왔던 것인가.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정말 위험한 것은 명징하지 않은 폭력이 아닐까. 실체가 없으니 의식하기 어려울뿐더러, 그런 폭력은 불안해하는 여성들을 ‘예민한 존재’로 뭉뚱그려 취급한다. 이러한 타자화를 통해, 가해자는 여성이 느낀 공포의 원인을 이해할 필요 없다는 면죄부를 제공받는다. 더 큰 문제는 피해자인 여성마저 본인에게 어떤 잘못이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를 검열하고 저항을 유보함으로써 이러한 폭력을 일상 속에 침투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이후 여성들은 남성의 행위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 사실을 묵인하거나 회피하며 살아간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괜찮은 사람」과 「호수―다른 사람」 속에 무섭도록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표제작 「괜찮은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연인과 함께 살 집을 보러 떠나는 ‘나’의 이야기로, 공간적 배경이 시종일관 남자의 차 안으로 고정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며칠 전, 남자는 ‘나’를 (실수로) 밀쳐 다치게 했는데 상처를 돌봐주려는 남자의 배려는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들 뿐이다. 팔을 들어올리는 것 같은 남자의 사소한 행동들마저 위협적으로 느낌에도, ‘나’는 왠지 남자에게 거절을 할 수 없다. ‘나’를 다치게 했던 그의 행위가 정말 실수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 역시 ‘나’가 다쳤던 경험 때문에 훌륭한 연인의 배려를 곡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내내 지울 수 없다. 과연 그는 괜찮은 사람인가. 「호수」는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가사상태에 빠진 친구를 둔 ‘나’가 친구의 연인 ‘이한’과 함께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이야기이다. 친구가 쓰러져 있던 호숫가로 향하는 중, ‘나’는 자꾸만 ‘이한’이 친구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친구로부터 그의 혐의를 증명할 만한 발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려 한다고 느낀다. 그렇게 그와 단둘이 걷는 일이 두려워진다. ‘나’의 공포감은 일면 타당한데, 그녀가 예전부터 여성에게 일어나곤 하는 위험한 사건들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피해자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애써 생각하며, 남성의 폭력을 묵인하거나 수용했다. “그래야 (안전)할 것 같았기” 때문에. 뒤이어 ‘나’는 폭력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실마리일지도 모를 호수 속의 딱딱하고 날카로운 물건을 마주한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나’는 ‘이한’에게서 어떤 위협을 느끼며 다시 한번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 이후 벌어진 일은 드러나지 않은 채 작품은 끝을 맺는데, 그렇다면 대체 ‘나’가 행한 일이란 무엇일까. 강화길 소설은 대부분의 경우 결국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해하려 했든 아니든, 그녀들이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화길은 타인에게 ‘유난스럽다’고 여겨지거나 스스로를 예민한 상태라고 검열하는 여성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실제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에겐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학습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를 고민해보도록 유도한다. 이를 숙지한 뒤 「호수」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읽어보자. 화자 ‘나’가 해야 했던 일이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이한’에게도 순응하는 것이었을까? 이 “그래야 할 것 같았다”의 의미가 다르게 읽히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던 폭력에 항거할 준비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 고인 안락을 뒤흔드는 소설의 힘 강화길이 2012년 발표한 등단작 「방」은, 무너져내리는 세계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연인 곁을 지키는 한 인물의 처절한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로부터 약 5년이 흘렀지만, 세계는 복구될 가망 없이 여전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혐오 발화가 우리의 언어를 채우고 있고, 드러난 폭력의 충격에 더해 감춰진 폭력이 우리를 학습된 무기력에 빠뜨린다. 파국에 다다르고 있는 것은 개인의 삶만이 아니다. 우리가 주권을 위임하며 그것을 올바로 행사해주길 바랐던 이들마저도 거대한 파국을 현실로 당겨오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소설 속 개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보다 신뢰해야 마땅한 자들의 목소리마저 믿을 수 없는 세계 속에 놓였다. 그리고, 불안해하고 싶지 않아 스스로 희망을 버리고 안락한 절망의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아직은 ‘괜찮다’고 애써 믿으며. 강화길 소설 속 화자들은 그런 이들을 투영하고 있다고 읽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집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세계를 찢고 나오려 하기보다는 그 안에 머무는 쪽을 택하므로. 황현경은 해설에서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다. “절망이 희망보다 안락하고 희망이 절망보다 불안하다면 우리는 끝을 향해 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에 따르면, 강화길의 소설은 그런 우리의 안락을 뒤흔드는 경고다. 여러 편의 소설에서 거듭 등장하는, 아마도 편안한 소진[安盡]을 의미하는 듯한 ‘안진’이라는 지명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깨닫도록 작가가 던지는 힌트이기도 하다. 순진한 믿음에 균열을 내고, 들려오는 목소리를 한번 더 의심해보게 함으로써, 강화길 소설은 우리에게 무너져가는 세계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소설집을 읽은 뒤 우리는 안락 속에 애써 묻어두었던 불안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각자가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작가의 말 “I am the captain of my fat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laughter is possible.” ?Shirley Jackson * 강화길이 이 지면에 통상적인 ‘작가의 말’을 적는 대신 셜리 잭슨의 문장을 인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강화길 소설이 셜리 잭슨의 작품들과 결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화길이 소설가로서 목표하는 바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겠다. 또한 이 문구가 남편으로부터 정서적 학대를 당하던 셜리 잭슨이 남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던 시기에 쓰였다는 사실은 강화길 소설을 관통하는 ‘여성해방’이라는 주제를 환기시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