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인만의 유일신 종교를 고대하다
이슬람 탄생이 임박한 6세기 말의 아라비아 반도는 두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아라비아를 관통하는 무역로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두 제국은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 외에도 내부적으로는 종교 논쟁으로 골머리가 아팠다. 페르시아는 조로아스터교 내의 갈등으로, 비잔틴 역시 삼위일체 논쟁으로 내적인 에너지를 소진하고 있었다. 양 제국 내에서 이단으로 몰린 자들이 아라비아를 망명지로 삼으면서 아라비아에는 새로운 이념들이 물밀듯 유입되었다.
원시적인 생활에 만족하던 아랍인들의 삶에도 놀라운 변화들이 나타났다. 풍부한 물질 문명의 유입으로 무기와 갑옷, 싸움의 전술에 진보가 나타났다. 이것은 머지않아 ‘꾸란 아니면 칼’을 외치며 전개될 이슬람 정복운동을 위한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이웃들이 가져온 종교와 문화를 접하고 문자가 생기고 자신들의 언어로 삶을 기록하는 일들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하늘, 별, 나무 등을 섬기는 원시적인 우상숭배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욱 차원 높은 이념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이들에게 부각된 차원 높은 유일신 종교의 후보는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유대교,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페르시아 제국의 조로아스터교였다.
민족적인 성격이 지나치게 농후한 조로아스터교는 처음부터 자격 미달이어서 일찌감치 순위에서 밀려났다. 이런 가운데 조상들이 해 오던 샤머니즘적인 우상숭배를 멈추고, 그렇다고 기존의 일신교 종교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뭔가 차원 높은 종교를 기다리던 그룹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을 ‘하니프’라고 하는데, 이후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초기 개종자들도 바로 이러한 하니프 그룹에서 많이 나왔다. 7세기로 넘어가면서 610년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라는 아랍인들의 일신교를 만들었지만, 6세기말의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한다면 일신교에 대한 열망은 이미 조성되었고 무함마드는 거기에 불을 붙인 매개자였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 p. 47
메카 함락과 아라비아 반도에서 유대인의 추방
무함마드와 함께 메디나로 이주한 초기 무슬림들은 재산을 메카에 두고 와서 가난했고, 유대인들의 부에 맞설 만한 자체적인 군대도 없었다. 무함마드는 메카로 향하는 대상로를 습격해 상품을 노획하기로 결정했다. 메카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메디나에서 무함마드가 이끄는 무슬림들이 메카행 상단을 노략질하는 것은 단순히 비즈니스에 손실을 입히는 차원이 아니었다. 이것은 메카 주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는데, 대상단은 1년에 두 번 떠나 돌아올 때는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과 의복, 소금, 설탕 등을 싣고 왔다. 농사가 가능한 메디나와 달리 토질이 척박해 농사가 힘든 메카는 식량의 상당 부분을 교역에 의존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메카 주민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가는 메카에서 대상단을 이끈 경험이 있던 무함마드 자신도 잘 알았을 것이다.
위협을 느낀 메카 주민들은 624년 바드르 계곡에서 무함마드 군대와 전투를 했는데 놀랍게도 무함마드 군대가 승리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 전투에서는 메카군이 승리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무슬림 군대는 도망치기에 바빴는데, 이 전투에서 무함마드는 전투 중 무슬림들이 절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이유로 무함마드는 꾸란에 두 개의 계시를 추가했다.
1, 비무슬림과의 전투 중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가는 사람은 지옥 불에서 타게 될 것이다.
2, 비무슬림과 전투를 하다 죽으면 그 즉시 천국으로 들어가서 70명의 처녀들에게 영접을 받고 마시고 싶은 모든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이때 추가된 계명은 전투에 임하는 무슬림 군대를 ‘후퇴를 모르는’ 무서운 돌격대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우후드 전투가 있던 625년에 한 유대인 여성이 무함마드를 독살하려다가 실패하는 일이 발생했다. 무함마드는 그녀가 속한 부족을 추방하고 모든 재산을 탈취함으로써 보복했다. --- pp. 60-61
비잔틴 제국의 최종 멸망
오스만 터키의 주력군이 박살나면서 주변국은 엄청난 대리만족의 행복감에 빠졌다.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의 오스만 터키 속국들도 해방되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가 전사하고 오스만 터키는 술탄이 없는 무정부시대의 혼란기(1402~1413년)를 지나야 했다.
무라드 2세 (1421~1451년)는 참담하게 쇠락한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무거운 부담을 안고 술탄에 즉위했다. 그의 통치 기간 30년 동안 오스만 터키는 무서운 속도로 재기했고 무적의 터키 군대도 재건되었다. 주변국들도 오스만 터키의 속국으로 속속 복귀됐다. 1404년, 그러니까 앙카라 대패 2년 후에 태어난 무라드 2세의 성장기는 초토화된 터키군의 처절한 회복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런 이유로 무라드 2세는 다시 강성해진 터키군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숙적인 기독교, 그러한 기독교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버릴까?’
이것이 다시 최강 군대를 재건한 무라드 2세의 고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수도와 주변 지역만 남은 비잔틴 제국을 굳이 멸망시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곳은 종교를 떠나서 어느 나라 상인에게나 이상적인 자유 항구였고(지금의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터키도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충분히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완벽한 성채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자면 분명 엄청난 출혈을 각오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이상보다는 현실을 택했고 가까스로 재건한 터키군을 무모한 전쟁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 p. 138
Q: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 1800여 년간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랍인들의
땅을 강탈해서 이루어진 것인가?
A: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예언서에 언급된 이스라엘 땅의 회복과 관련된 말씀을 근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는 입장과 인정하더라도 해석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 이런 경우는 이스라엘 건국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적인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기 전 팔레스타인 땅은 한마디로 메마른 사막과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로 덮인 황무지였다. 이것은 인구통계를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1882년에 28만 명이 살던 팔레스타인 땅은 1995년 756만 명으로 증가했다. 28만 명 가운데 유대인이 3만 4,000명을 차지한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은 성지 이스라엘과의 연관성을 꾸준히 지속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늪지와 사막으로 버려진 팔레스타인 땅이 개발되고 지금과 같은 농업 천국으로 바뀐 것은 1890년대 유럽의 유대인들이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유대인들은 유럽 유대인 가운데 최대 부호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대 민족기금’을 통해 땅을 구입해서 농업 정착촌을 만들었다. 아랍의 대지주들은 낙후된 팔레스타인 땅을 벗어나 주로 카이로, 다메섹, 베이루트와 같은 대도시에 살았는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사막과 늪지로 버려진 자신들의 땅을 매입하자 경쟁적으로 가격을 올렸다. 1944년 기준으로 중동의 비옥한 토양이 에이커당 110달러에 거래될 때 팔레스타인의 불모지가 1,000달러에 거래된 것을 보면 당시의 개발 열풍과 함께 팔레스타인에 땅을 소유한 아랍 지주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상황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태수인 후세인과 그의 아들 파이잘을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왜 환영했는지 이해하게 해 준다. 이들은 선진 기술을 갖춘 유럽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옴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지역 경제가 소생할 것을 기대한 것이다.
아랍 지도자들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났는데 고용의 기회가 생기고 봉급 인상과 함께 삶의 수준이 올라가자 많은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왔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의 80%는 소작농으로서 당시 ‘기회의 땅’으로 부각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온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유대인들은 1890년대 시오니즘 열풍이 불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기 전부터 수천 년 동안 성지 이스라엘에서 살아왔다. 흔히 주후 70년 성전이 무너진 후 모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것으로 알지만 유대인들은 성지에서 계속 살아왔다. 9세기, 11세기에는 상당한 번영을 누렸고, 12세기에 유럽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올 때도 유대인들은 아랍인과 함께 싸웠다.
둘째, 1948년 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의 상당수는 그곳에서 수천 년 동안 살고 있던 정착민이 아니라 1890년대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과 함께 ‘고용과 기회의 땅’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온 아랍인들이다.
셋째,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땅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매입했으며 매입가는 당시의 이주와 개발 열기로 인 해 10배 가까운 비싼 값이 지불되었다.
--- pp. 258-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