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묵 건국대학교에서 사학을 공부하였고, 동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다. 논문에는 [볼셰비키 집권 원인에 관한 고찰], 저서로는 《이야기 러시아사》 등이 있다.
우종익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구학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와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주도 중문, 우도중학교 및 서귀포고등학교에서 교사를 지냈으며,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명예교수이다. 저서로 《이야기 세계사2》, 《사랑방에서 듣는 서양 문화》가 있으며, 공역으로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공저로 《바이마르 공화국》 등이 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인의 문명이 나타날 즈음 이집트에서도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도 수메르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농경이 시작됐다. 그것은 나일 강의 물과 그 강변을 따라 널려 있는 비옥한 진흙토가 있어 가능했다. 나일 강은 매년 홍수로 범람했으며, 때문에 강변에 비옥한 토양이 조성돼 있었다. 자연히 사막의 건조한 지대로부터 이곳 풍요로운 땅으로 인구가 몰려 부락이 형성됐다. 이러한 과정은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비슷하게 보이나,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선 나일 강은 티그리스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보다는 훨씬 더 유용했다. 비록 매년 홍수로 인해 강이 범람해 제방 위에 있던 모든 것이 진흙 속에 묻혀 버리기는 했어도 그 범람은 정기적이었기 때문에 예견할 수 있었다. 그 범람은 메소포타미아의 삼각주 지역과는 달리 규칙적이었다. 따라서 나일 강은 해마다 변함없이 기본적인 박자를 유지해 가며 고대 이집트인들의 삶을 규제한 거대한 시계에 다름없었다. 당시 고대 이집트에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라 불리는 상형문자가 사용되고 있어서 대략적인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상형문자는 기념비나 묘비 등의 공식적인 기록에 주로 사용됐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는 상형문자를 약간 개량한 히에라틱(Hieratic)이라는 신성문자(神聖文字)가 쓰였다. 이 신성문자의 형태는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보다 한결 유연했다. 그 이유는 이집트에서 주로 쓰인 파피루스가 종이처럼 표면이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고왕국 시대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의 기반을 세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집트인의 대규모 건축양식으로, 피라미드를 들 수 있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왕을 위한 거대한 무덤이었다. 피라미드는 그 규모가 엄청나 초보적인 도구들밖에 없었던 당시에는 무척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기제에 있는 가장 큰 피라미드는 높이가 거의 170미터에 달하고, 소요된 돌의 무게가 600만 톤에 육박했다. 그리고 각 변의 길이가 250미터에 이르렀는데, 그 오차는 불과 20센티미터 미만이었음을 볼 때 당시의 기하학 및 건축 수준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인은 피라미드야말로 자신들이 신 그 자체라고 믿고 경배하는 왕의 안락한 사후 거처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점 또한 메소포타미아와는 다른 특징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왕은 기껏해야 신의 대리인 구실을 하는 존재였지만, 이집트의 왕은 신의 화신(化身)이었다. 왕은 이집트의 중심이었고, 이집트는 우주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도 모든 자연현상을 신화를 통해 설명했다. 그들에게 파라오라 불리는 왕은 태양신 레(Re 또는 Ra)의 아들이었다. 파라오는 죽고 나면 저승 및 나일 강의 신인 오시리스와 결합돼 한 몸이 된다. 그리하여 파라오는 저승에서 신으로 부활해 나일 강의 범람을 조절하며 그로 인해 곡식이 결실을 맺게 되는 것이다. 파라오는 살아 있는 신이기 때문에 모든 국토는 그의 재산이었다. 이처럼 왕이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파라오만이 거대한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나일 강을 조절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자라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고왕국의 왕은 사제보다 더 큰 권위를 지니게 됐고, 곧 신적인 존재로 숭배를 받기에 이른다. 즉,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는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혼합돼 있었던 것이다. 피라미드 다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상징은 미라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은 후에도 영혼이 살아남는다고 믿어서 이를 위해 미라를 만들거나 무덤을 정성스럽게 꾸몄다. 미라를 만드는 것은 죽은 자의 내장을 제거하는 작업을 포함하는 등 매우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복잡한 일이었다. 내장이 제거된 시체는 특별한 방부제를 넣어 붕대로 조심스럽게 싸였다. 이들 미라 중에는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도 있어 수천 년 전의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현재까지 미라가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방부처리 기술의 우수성 못지않게 건조한 사막 기후가 부패를 막아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