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술을 제대로 이해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고 싶다. 술의 역사, 조주법, 그리고 술 특유의 매력을 알려주고 싶다. 또 술은 양보다 품질이 중요하며 좋은 품질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도록 안목을 길러주고 싶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그저 당신을 알딸딸하게 취해 비틀거리게 하려는 의도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설사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고 해도 거기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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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유서가 깊은 술이다. 정확히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역사가 대략 6,000~7,000년에 이른다. 지금 우리가 마시는 현대식 와인(또는 현대식 와인과 유사한 와인)조차 이집트, 그리스, 로마 사람들이 양조법을 진화해가며 무역을 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그 역사가 최소한 1,500년에 달한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이처럼 뛰어난 와인을 즐기게 된 점에 관한 한 유럽의 수도사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포도밭의 위치가 최종 와인의 품질과 특징을 크게 좌우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들이 바로 유럽의 수도사들이었으니, 그 공은 인정해줘야 한다. 특정 장소와 와인 간의 관계는 워낙 신비로워서 현대의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와인의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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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대다수 쌀 재배국에는 그 지역 고유의 쌀술이 있다. 중국 사오싱소(紹興)의 사오싱주, 한국의 소주 등이 대표적이다. 사케는 일본판 쌀술이며, 쌀술 중에서도 특히 우아하고 일관적이며 섬세하고 맛 좋은 술로 평가받고 있다. 사케를 한마디로 묘사하면 ‘고귀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사케는 양조 역사가 2,000년이 넘고 농경사회에서 신에게 공물을 바치던 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선물, 축제, 결혼식과 같은 의식과도 밀접하게 엮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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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짙은 색 맥주일수록 더 묵직할까? 그래서 짙은 색 맥주일수록 빵 세 덩어리를 먹은 것처럼 배가 불러서 다이어트에 더 적일까? 정말 그럴까?
꼭 그렇지는 않다. 맥주의 색은 순전히 구워진 정도를 반영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150쪽 참조). 맥주의 색은 풍미에 영향을 미칠 뿐 맥주의 무게감이나 ‘살찌게 하는’ 주범과는 아무 상관 없다. 흑맥주인 스타우트와 포터 중에도 몇 잔씩 연거푸 들이켜도 거뜬한 라이트바디의 맥주가 많은가 하면, 옅은 색이어도 입 안이나 뱃속에서 묵직하고 더부룩한 느낌을 주는 맥주가 있다. 맥주의 무게감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알코올 함량과 발효 후의 잔당이다. 따라서 색이 짙을수록 무조건 묵직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묵직함은 양조 방식에 따라 좌우된다.
그 좋은 예가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정통 아일랜드 흑맥주 기네스다. 기네스에는 ‘한 잔의 식사(meal in a glass)’라는 별칭이 따라붙지만, 실제로 따지자면 기네스의 열량은 탈지 우유, 오렌지 주스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다른 맥주에 비해 조금도 높지 않다. 다만 (질소로 인해 생성되는) 크림 같은 질감이 강한 데다 색이 짙다 보니 괜스레 더 배부르고 건강에 안 좋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것뿐이다. 묵직한 맥주를 피하고 싶다면 맥주 색이 아니라 알코올 도수를 따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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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았던 스피릿, 진. 19세기 런던의 뒷골목은 술 취한 무뢰한과 타락한 매춘부들이 비틀거리며 어슬렁거리는 풍경이 다반사였을 만큼, 진은 공장 근로자에게 초라함과 낭만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술이었다.
당시 그 인기를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하겠지만, 진은 ‘슬픔을 해소시키는 술’, ‘옷을 벗기는 술’, ‘어머니의 타락’, 그리고 아주 시적이게도 ‘빈자의 술’ 등 여러 가지 별칭으로 불렸다. ‘백색의 비단’, ‘위안자’, 라임을 맞춘 런던식 속어 ‘베라 린(Vera Lynn)’〔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인기를 끌었던 영국 가수로, 군인들을 위문하기 위해 이집트·인도·미얀마 등으로 순회공연을 다녀 ‘군인들의 연인’으로 불렸던 가수〕같이 좀 더 듣기 좋은 별칭도 있었다. 이런 역사를 생각하면 의외로 들리겠지만 사실 진은 영국이 원산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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