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쓰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호기심이었다. 내가 왜 이 마을에서 행복해졌는지 알고 싶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마을 친구들 또한 “이 동네 좀 이상해”라고 했고, “여기 와서 내가 변했어”라
고 찻잔을 어루만지며 고백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나는 종종 아침에 설레며 눈을 떴고 누군가를 만날 기대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행으로도, 책으로도, 일로도 흩어지지 않던 비관과 우울의 안개가 조금씩 걷혔다. 그곳에서 나는 더 많이 웃고 가벼워졌다.
이 마을에서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서투른 일이 명확해졌고, 이웃들은 내게 타인에게 솔직하게 다가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 덕분에 내가 먼저 웃고 배려하면 다른 사람도 흔쾌히 다가올 것을 종교처럼 믿게 되었다. 조금이나마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기분에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으며, 새로운 사람에게서 받을 상처를 겁내기보다는 관계로 풍요로워지는 삶에 놀라고 있다. --- p.10
“죄송하지만 오늘은 가게 여는 날이 아니어서 커피는 못 드실 것 같아요. 저희는 회의 때문에 잠깐 온 거고 커피를 내릴 줄 몰라서요. 하지만 코코아는 타 드릴 수 있어요.”
아이가 타 준 코코아 잔을 꼭 쥐니 언 손이 간질거렸다. 코코아 잔을 씻어 선반에 올려놓고 퀼트 천 한 묶음을 골라 포장지에 적힌 값을 무인계산 상자에 넣었다. 지난번 본 조립식 주택의 허술함을 보건대 이사 오면 아이 방에 예쁜 커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마 그때 난 이 마을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감지했던 것 같다. 이 마을에는 겨울이면 논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과 그들을 위해 썰매를 만드는 어른이 산다. 낯선 이에게 먼저 코코아를 권하는 중2 아이를 키워 낸 부모가 있고, 가족을 위해 난로로 집을 데우는 곳이다. 그리고 그네를 묶는 사람과 도예가와 꿀을 따는 사람들이 이 소박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사를 왔다. 고공 전셋값을 피해 맹모라면 오지 않을 마을로. 그리고 몇 년 후 그것이 단지 이 마을의 일부였을 뿐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 p.20
알고 보니 그것이 마을의 계산법이었다. 여러 계절을 보내며 나도 이 계산법에 익숙해졌다. 넘쳐나는 텃밭의 채소나 너무 많이 담근 레몬청은 봉지에 나눠 담아 아침에 무작정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그날 만나는 마을 사람 중에 필요한 이들에게 들려 보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도서관의 책상에는 ‘필요하시면 가져가세요’라는 포스트잇이 붙은 물건들이 종종 놓여 있었고, 나 또한 밑반찬과 식재료, 아이의 옷과 학용품 같은 것을 자주 받아들고 왔다. 오늘 놀러간 집의 식탁에는 어제 내가 받은 것과 같은 맛의 콩자반이 있기도 했다.
이들도 처음에는 아마 ‘현우네가 콩자반을 주었으니 그 보답으로 내가 상추를 주리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에 현우네에서 콩자반을 받았는데, 점심 때 경희 언니가 아이의 옷을 물려주고, 오후에 지민이네 부엌에서 부침개를 나눠 먹고, 저녁나절에 은뎅이가 나 대신 학교에서 아이를 데려와 주는 삶을 살다 보면 계산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답은 불특정 다수에게 베풀고, 내가 필요할 때에 불특정 다수에게서 받는 것이었다. 이 마을에 만연한 나눔의 습성은 부분적으로 중년부인들의 기억력과 수리 능력의 퇴행 탓이기도 했다. --- p.57
낮이 길어지고 장마가 가까워 오면 이 마을에서 흔해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감자다. 곳곳에서 “감자 키웠어? 좀 줄까?”라고 물어 온다. 마을에서 몇 해를 지나고 발이 넓어지자 나에게도 감자 봉지가 전해졌다. 하필 친정에서도 한 상자를 보내온 터라 남는 감자 봉지를 들고 예일이네 집으로 향했다.
자못 자랑스럽게 “언니, 감자 있수?”라고 묻자 예일 엄마가 “그러게 말이야. 이 동네 사람들 참 징하다” 하며 부엌 한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엔 감자 두 봉지에 오이, 양파까지 대여섯 개의 비닐봉지가 쌓여 있었다. “세 식구가 저걸 언제 다 먹어.” 예일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머쓱해진 감자 한 봉지에 언니가 떠밀다시피 한 오이까지 안고 돌아오는 마음이 왠지 씁쓸했다.
“언니는 어디서, 어떻게 다섯 봉지나 받았지?”
고등학교 시절 무선전화기에서 시작해 널따란 앤티크 책상까지, 옆집에 있는 많은 것을 부러워해 봤지만 감자 봉지에 질투하게 될 줄 은 몰랐다. 그러니까 아마 그 언저리부터였나 보다. 내가 빅맨의 야망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 --- p. 97
이 마을의 봄은 주말마다 바쁘다. 전국의 고속도로가 상춘객으로 막히고 마을의 좁은 도로가 브런치와 맛집을 향하는 자동차로 가득 차도 나는 애가 탈 것이 없었다. 도서관 앞마당에서는 거의 주말마다 장터도 열리고, 음악회도 있고, 백일장이 있고, 학교 운동장에 서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모이는 장터와 운동장 캠핑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약 같은 겨울을 견딘 기쁨에 들떠 모여들었다. 하루 종일 즐겨도 돈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아이들은 운동장과 숲을 헤집으며 자동 놀이기계가 되었고, 어른들도 백일장과 장터를 핑계로 서로가 서로에게 즐거움이 되는 순간을 만끽했다.
진을 빼는 여름의 절정엔 도서관 앞마당에서 ‘모깃불 영화제’가 열린다. 작년 여름에도 나는 회벽을 스크린으로 흑백영화를 봤다. 아이들이 막대기로 모깃불을 휘저으면 반디 같은 불티가 여름의 밤하늘로 흩날렸다. 나와 딸은 평상에 누워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을을 기다렸다. --- p.142
마을 사람들을 묶어 주는 도서관, 목공소, 그냥가게와 생태교실, 마을음악회 등의 행사는 안홍택 목사를 비롯한 초기 이주민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안홍택 목사는 마을의 다양한 일을 제안하고 사람들을 독려했다.
그냥가게의 골골거리는 석유난로 옆에서 마을에서 이런 일을 시작한 연유를 묻자 그가 답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은 자본에 대척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에요. 도서관도 그렇고 그냥가게도, 목공소도 자본에 맞서 보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놀면 부자보다 더 행복해지거든요. 반자본의 정신은 함께 모여 잘 노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가게의 커피 가격을 정할 때에도 안목사는 “돈을 받는 것은 자본의 논리이니 우리는 돈을 받지 않기로 하지요”라고 말했다. 공짜 커피에서, 도서관에서, 생태교실에서 나와 친구들이 느꼈던 이유 모
를 따뜻함은 그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달궈진 것이었다. --- p.164
만약 내가 다시 이사 갈 마을을 찾고 집을 짓는다면 남향에 깨끗한 싱크대와 욕실이 있는지만을 고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150평의 땅 위에 폴딩도어를 단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는 것이 전원생활이자 마을의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내게 마을이란 같이 꽃을 심던 친구와 여름이면 매일 제습기 두 통을 비워야 했던 습하고 작은 도서관, 그 도서관 안에서 부비며 놀던 아이와 어른들, 그들과 나눴던 셀 수 없는 음식과 그들의 부엌에서 보냈던 시간, 이웃과 내 아이가 놀고 먹고 씻으며 아웅다웅했던 기억이다. 잘 지은 집은 몸을 편하게 하겠지만 행복까지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때로 지긋지긋하고 도망가고 싶기까지 했던 강렬한 관계 속에서, 그로 인해 배운 것들로 비로소 행복해졌다.
---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