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지 말라는 건 아니야. 애들 때문에 산다, 그런 순간도 있긴 있지.”
그런 민 팀장을 보며, 재희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괜찮을까.
“하지만 말이야, 여기 앉아 있다 보면 그런 게 보인다? 시간 지나면 자기랑 비슷한 때 데뷔한 작가들이 하나둘씩 사라지잖아. 그치? 힘들고 지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능력이 부족해서 밀려나는 경우도 있지. 그런데 여자 작가들은 그게, 자기가 못나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 능력 되는 사람도 아이를 낳거나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못 버티고 사라지더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죽을힘을 다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한 사람. 그런 사람이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너는 아이를 낳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재희는 그 질문이, 민 팀장이 자신만 국한해서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건 일하는 모든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 p.43
“우리 서정환이, 이지원이 커플이 참 잘했어. 요즘 젊은 여자들이 이기적이라 애를 안 낳으려고 해서 국가적으로 큰 문제인데, 애 낳는 게 국가에 충성하는 거지. 암.”
암은 무슨, 듣다가 스트레스로 없던 성인병들이 생길 것 같았다. 국가에 충성이라니. 유치장이 미어터지게 범인들을 잡아넣으며 살아온 11년 커리어는 다 소용없다 이거냐고.
그리고 애 안 낳는 게 왜 여자 탓이야? 애는 여자 혼자서 만들어? 왜 같은 말을 남자한테는 안 하는데?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애 안 낳을 수도 있지. 지옥불 반도 소리가 나오게 인생 팍팍해서 못 낳겠다는데, 거기다 나이든 사람들이 말을 해 봤자 그게 곱게 들릴 리가 없잖아.
“태교한다고 생각하고, 우리 지구대 오면 당분간 도 닦는다 생각하고. 응? 성질 죽이고.”
지원은 필사적으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왜, 내가 임신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데!
--- p.89
“엄마가 되려는 사람이 이렇게 겁이 많아서 어떡해요.”
“엄마고 뭐고 아픈 건 아프다고요.”
“이건 이틀마다 같은 시각에 맞는 거예요. 혼자 할 수 있죠?”
“…예.”
“해야 해요. 아기 낳으려는 엄마들 모두가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고.”
재희는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했다.
주사를 맞는 시간 간격이 중요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어서, 아예 처음 주사를 맞을 때부터 평소에 수업을 나가거나 외출하지 않을 시간대로 잡아놓고 움직였다. 휴대폰에 알람을 맞춰 놓고, 주사약은 냉장고 앞 칸에 넣어 두고, 정확하게 주사를 맞았다. (중략)
주사를 맞으면 아팠다. 속이 메슥거리고 온몸이 나른하고 늘어졌다.
재희는 잠이 늘었다. 평소보다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어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 본격적인 임신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늘어져서야 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 p.97
“베트남으로 가든가, 사표를 내든가!”
부장은 소리쳤다.
“거, 임신이 벼슬이냐? 좋겠네. 나도 임신해서 열 달 배불러서 놀고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어? 뭐 할 말 있어?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사람을 빤히 쳐다봐?”
“….”
“왜, 내 앞에서 너 유산한 이야기라도 하려고 그래? 야, 유산 그거 뭐 별건 줄 아냐? 예전에 우리 마누라도 한 번 했었고요. 유산한 게 무슨 벼슬이세요? 난 그런 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까 수작 부리지 마. 어디서 예쁘지도 않은 게, 푹 늙은 아줌마가 수작 부리면 뭐, 어쩌라고. 어?”
그리고 선경은 그런 부장을, 화도 내지 않고 냉연하게 바라보았다. 뱃속에서 두 아이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전에도, 이 회사 상사들은 그런 식으로 윽박질러서 일을 시켰다. 임신이 벼슬이냐면서, 남들 다 하는 걸로 유세 부리지 말라고도 했다. 팀 프로젝트가 가장 중요하다면서, 이래서 여자 데리고는 일을 못 하는 거라며 목청을 높였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일했지. 아주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일하면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조직은, 선경을 일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 p.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