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원하는 일을 찾으려 고민했고, 꿈이란 걸 찾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난 또 힘들어? 시작할 땐 다 괜찮을 것만 같았던 모든 것들이, 왜 지금의 나는 하나도 괜찮지 않은 거야? 어디에나 싫은 사람과 싫은 상황이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왜 난 지금 이 상황이 싫어 죽겠는 건데? 그래서, 또 다른 직장인이 되면 되는 건가?
--- 「그래서, 직장인이 되었다」중에서
사실 출근이라는 건 진심 대단하다. 매일 아침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엄청나게 일찍 일어나 엄청난 출근길을 뚫고 엄청나지 않은 일들을 하러 간다. 그러나 ‘나는 그 대단한 출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위로하기엔, 출근이라는 문 뒤에 이어지는 오늘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다.
--- 「출근하지도 않았는데 퇴근하고 싶어」중에서
사람마다 일의 가치를 두는 곳은 다르다. 누군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저 아래 순위의 것일 수 있다. 누군가엔 연봉이, 누군가에겐 승진이, 자기 계발이, 회사 분위기가, 오늘 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핸들을 때리게 하는 고민거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유야 저마다 다를지언정 취직, 그 이후의 삶이 상상 이상으로 고단한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거다. 그것을 입사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을 거란 사실도.
--- 「굿모닝, 똑같은 아침입니다」중에서
‘해/하지 마’ 화법은 누군가의 삶에서 엄마 정도의 레벨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함부로 구사해선 안 된다. 아무리 실패가 너무 뻔히 보여도, 그 인생 하나 구제해 주고 싶어 미치겠어도 마찬가지다. 그 멍청이가 짚단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든, 그래서 그 인생이 망하든, 망해서 누굴 원망하든 그것 또한 그가 선택한 그의 인생이니까. 감당 또한 그의 몫이다.
--- 「그만두지 마 움직이지 마 도망가지 마」중에서
변화에 대해 내가 기대하는 ‘최소한’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느 날 나의 새로운 전쟁터에서 마음이 미친 듯이 널을 뛸 때 붙잡고 견딜 한 가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국 그 생활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러니 발을 떼기 전에 미리 질문해 보자는 거다. 이 결정에 있어 내게 ‘가장 중헌 것’은 무엇인지.
--- 「당신이 사표를 쓰기 전에 써 두어야 할 것」중에서
우리가 살면서 선택한 것들이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이직이라는 선택도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는 마스터 키가 되지는 않는다. 뽀얀 새 연봉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그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새롭게 써 나가야 할 또 다른 긴긴 챕터의 시작이다. 오히려 누구를 탓할 수 없기 때문에, 아무도 등 떠밀지 않은 압박 열차에 올라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 「퇴사한 그 애는 꽃길만 걷고 있을까」중에서
상황에 따라 생각이 흔들리는 건, 일과 직장생활에 대한 나의 관점이 매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초점을 맞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계속 흔들거리며 나의 시점을 따라가 보는 거다. 내게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은 견디기 어려운지에 대한 판단 기준은 타인에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이 이리저리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다듬어진다. 누구나에게 똑같이 더 좋은 회사는 없다. 또한 더 좋은 어딘가가, 반드시 회사여야 할 필요도 없다.
--- 「‘더 좋은 회사’란 있는 걸까」중에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내가 노력해서 나아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성공이다. 그런 작은 성공의 경험들을 무심히 흘려보내지 말자. 놓치지 말고 콕 찝어내어 알아주자. 어느새 이만큼이나 나아졌구나, 잘했다. 이젠 이걸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잘했다. 네? 고맙다구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구나! 수고했다, 수고했다고? 잘했다! 이것은 단지 ‘수고했어, 오늘도.’ 하고 마는 셀프 쓰담이나 자조적인 위로가 아니다. 이건 진짜다. 진짜 노력했고, 진짜로 성장하고 있고, 진짜로 잘하고 있는 나에 대한 팩트를 인정하는 거다. 이렇게 한 번 두 번 스스로의 성공을 알아 준 경험이 쌓이면, 그것은 남들의 인정 없이도 나의 오늘에 뿌듯해하고 나의 내일에 도전해 볼 맘을 갖게 해줄 근거가 된다.
---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중에서
덮어 놓고 ‘넌 왜 노력하지 않아? 노오력을 해!’ 하는 말이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것처럼, 반대로 ‘뭐하러 그렇게까지 노력하느냐’는 시선에도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노력해도 안 되는 세상이 문제지,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노력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혹은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노력해 볼 것인가의 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다. 그 치열함은 타인이 강요할 수도 없고, 반대로 폄하할 수도 없다.
--- 「치열함은 죄가 없다」중에서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들어준다’는 건, 그래서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 일이다. ‘처음에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것을 믿고 발전시켜 행동했을 때 결국 내게 더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는 경험적 믿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낯설수록, 오히려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이 산이 아닌개벼’를 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막연한 첫 생각과 자꾸만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머리채 붙잡고 싸워도 보면서 고민의 근육을 늘려 놓는 거다.
언젠가 ‘저 산으로 한번 가 보면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스스로 납득하고 믿어 줄 있는 힘을.
--- 「이 산이 아닌개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