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가정에서 점점 소외되고 가족의 주위를 위성처럼 맴돌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우고, 먼저 다가가고 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념을 갖고,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자신이 자라온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려는 아빠들이 의외로 많다. 어쩌면 나 역시 그쪽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내 어릴 적 꿈은 ‘좋은 아빠’였다. 그만큼 오래 그렸던 그림이었고, 잘할 자신도 있었다. 그저 내가 자란 대로, 내 생각대로 키우면 될 거라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아이는 잘 자라주었고 하마터면 나도 ‘신념’이 생길 뻔했다. 하지만 자신감 하나만으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도 아빠는 처음이라 아이가 커갈수록 갈팡질팡하는 순간들이 찾아왔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선택은 육아서를 꺼내드는 것이었다. 닥치는 대로 육아서를 읽으며 고민하고 적용하며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 p.8
“말이 좋아 루틴이지, 늦게 퇴근해서 애들 얼굴 볼 시간도 없는 데 루틴은 무슨…” 이 시대 아빠들의 볼멘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지만 긴 출퇴근 시간에, 야근에 회식에, 이래저래 피곤에 찌든 대다수 직장인 아빠들에겐 퇴근 후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해 들어와 구겨져 잠들기 일쑤였고, 아침엔 1분이라도 더 자려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수시로 알람을 확인하며 악몽을 꿨다. 시간을 계산하며 버티고 버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내는 아침마다 본인 출근 준비에 아이들 등교 준비까지 정신이없는데 나는 내 한 몸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육아서(까지 썼다는) 작가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미안해만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주자고 결심했다.
--- p.25~26
한 번은 찜질방에서 하브루타를 하자는 아이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온 질문을 던져보았다. “기차가 철길을 달리고 있는데 앞에 철로를 수리하는 5명이 있었어. 이대로 가면 5명이 죽는 상황이야. 그런데 옆 비상 선로로 노선을 틀면 거기에 서 있는 1명이 죽는 상황이야. 윤이 준이는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아?”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 알리면 된다, 헐크가 나타나 기차를 막으면 된다는 등 어떻게든 선택지를 늘려볼 노력을 했지만 이도 저도 안 되고 딱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니 준이는 짜증을 냈다. “왜 다 안 된다는 거야! 왜 아빠 마음대로만 하는 거야!” 극한으로 몰아넣는 이 상황이 괴로웠던 것이다. 결국 아이들은 5명을 살리는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윤이는 “5명이 철로를 수리하고 있었다고 했잖아요. 그럼 철로가 고장 났다는 말인데 고장 난 철로로 가게 되면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거 아니에요?”라며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짚었다.
--- p.34~35
내가 먼저 초등학교 때 학교 화장실에서 간발의 차로 바지에 설사를 해버린 흑역사를 실감나게 들려주니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이들에게 똥 이야기를 하면 반은 먹고 들어간다. 살신성인해서 멍석을 깔아주니 아이들은 하나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윤이는 동생과 싸웠을 때 형으로서 부끄러웠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속없는 형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번엔 ‘스스로 멋있다고 느낄 때’가 언제인지 물으니 미용실에서 머리하고 나올 때, 축구하다 골을 넣었을 때 등 외모나 성취에 대한 답변이 많았는데 막내 준이의 답변이 압권이었다. “맨날 방귀만 뀌는 못난 아빠 아래서 이렇게 내가 잘 자라고 있구나하고 느낄 때요.” 준이의 답변에 모두가 빵 터졌고 준이는 한 건 했다는 뿌듯함으로 의기양양했다. 준이는 이어서 “제가 말싸움을 잘할 때요. 제가 남자 애들 중에 말싸움을 제일 잘하는데 여자애들은 말로 못이겨요”라고 말해 다시 한 번 모두를 웃겨줬다.
--- p.78
나는 윤이와 준이에게도 소리로 기억되는 추억들을 많이 심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함께 기억하고 싶은 순간엔 그 분위기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해 들려준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며 영화 [놈놈놈]OST를,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며 [잔나비] 노래를,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브라운아이즈] 노래를 함께 들었다. 아이들은 노래를 듣고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다. 함께 추억에 젖어들 수 있는 노래가 있다는 것, 참 행복한 일이다. 노래를 듣는 것에 더해 소리를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요즘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이 유행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백색 소음을 말한다. 나는 가끔 책 넘기는 소리, 빗소리, 만년필 사각거리는 소리 등 내가 좋아하는 소리를 녹음해 아이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아이들과 놀러가서도 파도 소리, 발걸음 소리, 낙엽 밟는 소리 같은 그 장소만의 소리를 녹음한다.
--- p.88~89
아이들에게 어른의 고민 상담이 가능할까, 고민 상담이 무슨소용이 있을까 싶겠지만 의외로 큰 효과가 있다. 때론 아이들로부터 무릎을 치는 혜안을 얻기도 하고, 아이들도 아는 것을 어른인 내가 못하고 있으면 되나, 부모인 나부터 모범을 보여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한편 아이들은 부모의 고민 상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3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선 보이지 않던 것들이 3인칭 관찰자가 되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바 ‘메타 인지’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아빠가 자신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해준다는 뿌듯함, 아빠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힘들지만 참고 노력하는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동질감을 느낀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부모의 고민 털어놓기를 통해 아이가 부모에게 인간미와 신뢰감을 느끼고 공감 능력, 소통 능력, 이타심, 리더십 등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 p.99
동동이는 우리 집에 온 지 5개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가 이렇게 빨리 죽다니. 우리가 잘못 키운 탓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들에겐 난생 처음 겪는 이별이었다. 아이들은 동동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예전 한 프로그램에서 김제동이 철학자 강신주에게 고민 상담을 했던 장면이 내겐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이젠 사람을 만나서 이루고 싶은 게 없다. 결혼도 필요 없고 고민 없는 지금이 좋다. 예전엔 남들이 정신병자 같다고 생각할까봐 사자 인형을 못 샀는데 어제 사자 인형을 샀다.” 김제동의 말을 듣고 강신주는 이렇게 답했다. “사자 인형은 안 죽는다. 아이들에겐 살아 있는 애완동물을 키우게 해야 한다. 우리가 왜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줄 아느냐. 죽기 때문이다. (사자 인형 같은) 영원한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린애들이다. 성숙한 사람은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 p.107~108
내 기억 속엔 지금의 내 정서에 영향을 준 어린 시절 몇 장면이 있다. 그중 하나는 부모님께서 집에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던 장면이다. 주로 형과 나에 대한 이야기와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이야기였던 것 같다. 부모님이 웃으며 대화하고 감동받아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저런 대화를 나누는 구나’ ‘나도 어른이 되면 저렇게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 큰 유산을 받은 것 같다. 그 영향 때문인지 우리 부부 역시 대화가 많다. 첫사랑과 만나 9년을 사귀고 올해 결혼 12년째로 인생의 절반을 함께 했는데 아직도 대화가 넘쳐난다. 집에 오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눈다. “여보, 오늘은 어땠어요? 고생 많았죠?” 직장에서, 집에서 있었던 일을 공유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렇게 상대를 배려하고 공감하며 대화하는 부부의 모습은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 p.121~122
브라이언 카바노프 신부가 쓴 [색다른 심판]이라는 글에는 남아프리카 바벰바 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 부족 사회에서는 반사회적 범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비결은 이색적인 재판이다. 이들은 죄를 범한 사람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운다. 그러면 모든 부족원들은 일손을 놓고 몰려들어 그를 둥글게 에워싼다. 모든 이웃들은 그 죄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비판이 아닌, 지금껏 자기에게 베풀었던 호의와 모든 선행을 차례로 발표한다. 이러한 인민재판은 며칠 밤낮을 계속해서 진행되고 부족 전체가 그 죄인의 칭찬거리를 찾아내는 일이 끝나면 즐거운 축제가 벌어진다. 죄인은 죄를 뉘우치고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돌아온다. 이들은 죄인의 잘못이 아닌 가능성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 죄인을 변화시킨 원천은 ‘당신은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부족원들의 믿음,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 p.135~136
화는 다스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상사를 대할 때는 화가 나는 순간에도 얼마든지 화를 억누르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 내가 제압할 수 있는 약자인 아이들에게 내 감정을 손쉽게 알리기 위해, 빠르게 제압해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화’라는 카드를 쓴 것뿐이다. 짜증 내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다툼을 세련되게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린 것이다. 오히려 아이들을 훈육하려 했던 행동을 똑같이 반복하며 일방적으로 자기주장만 하는 잘못된 예만 교육한 꼴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실수를 반성과 도약의 계기로 만들면 된다. 가만히 앉아 상황을 재구성해보았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아이들의 짜증 섞인 말이 듣기 힘들었고 내 평화로운 자유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 p.142
“경찰아저씨가 잡아간다!” 내가 아이들에게 무심코 뱉었던 말이다. 아이들이 떼를 쓸 때면 윤이에겐 해병대 캠프에 보내야겠다고, 준이에겐 서당에 보내야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TV를 보고 군대와 서당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약효가 있었다. 하지만 말을 잘 들어야 하는 이유를 무서운 대상을 설정해 그 대상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적인 효과는 없다. 차에서 안전벨트를 매고 얌전히 있어야 하는 이유가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찰에게 걸리기 때문이고 떼를 쓰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군대와 서당에 가야 하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부정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것을 해야 하는 정확한 이유를 납득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 p.163
가족회의가 성공적으로 정착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중요한 팁이 있다. 첫째는 아이가 가족회의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즐겁게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떤 말을 하든 반박하지 않고 칭찬해주며 기를 살려주는 것은 기본이고, 가족회의가 끝나면 일주일치 용돈을 준다. 아이들은 용돈을 받는다는 생각에 가족회의를 기다린다. 심지어 이번 주는 왜 가족회의를 안 하냐며 따지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아이들에게 배움이 즐거운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책에 꿀을 발라놓는다고 하는데 용돈이 이와 비슷한 효과를 주는 것 같다. 둘째는 ‘가족회의록’을 적는 것이다.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내가 가족회의록에 기록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한 말들을 아빠가 회의록에 적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발언에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 p.186
1959년 러시아에서 실시한 유명한 실험이 있다.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 최대한 움직이지 않고 서 있게 했더니 2분을 버틴 반면, 다른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보초 서는 군인인 척, 움직이지 말고 보초를 서도록 했더니 무려 11분을 버텼다고 한다.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는 게임 같은 상황을 만들고 역할을 주는 것만으로도 성취동기가 생겨 자기 통제 능력이 생긴 것이다. 유대인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주인공 귀도는 다섯 살 아들 조슈아에게 수용소 생활은 단체로 참가한 게임이고 1천 점을 제일 먼저 딴 사람에게는 탱크를 상으로 줄 거라며 모든 상황을 게임처럼 받아들이게 한다. 덕분에 조슈아는 그 힘든 상황을 잘 버티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윤이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아빠만 따라다녔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상황이 많았지만 어린이 기자의 역할을 부여받은 윤이는 쉴 새없이 관찰하고 기록하며 멋지게 임무를 수행해냈다.
--- p.210~211
어느 주말, 강화도에 있는 한 어린이 책방을 찾았다. 내비는 한적한 곳에 홀로 서 있는 가정집 앞으로 안내했다. ‘우리가 제대로 온 게 맞나?’ 하지만 책방 문을 열자마자 아내와 나는 그곳에 반해 버렸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마음껏 동화책을 읽었다. 비현실적인 느낌에 일상에서 벗어나 진짜 힐링을 하는 기분이었다. 분위기에 취해, 책에 취해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윤이가 내게와 조용히 속삭였다. “아빠, 준이랑 동네 탐험하고 와도 돼요?” 책방을 돌아나가면 산책을 할 만한 뒷산이 있었는데 아이들끼리 가도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럼~ 엄마 아빠는 여기서 책 읽고 있어도 되지? 혹시 모르니 아빠 휴대전화를 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아이들은 둘만의 진짜 탐험을 나선다는 사실에 신나하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 p.230~231
“윤이 준이는 너희가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 같아?” 둘이 동시에 대답했다. “달팽이와 강아지 꼬리를 섞어서요.” 윤이 준이는 책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고 계속 책을 읽었다. 책 속 아이들은 “엄마 아빠, 엉터리!” 라며 크게 웃은 다음 그림을 그려가며 부모에게 아기가 생기는 과정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여러 체위까지 그림으로 묘사된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아이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우려와는 달리 선입견 없는 아이들은 그 그림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겐 그것이 야하고 이상한 것이 아닌, 순수한 지식과 정보일 뿐이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지금 성교육을 시작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국제교육 과학문화기구에서는 5세 유아부터 성교육을 시작하라고 권장한다. 요즘은 초등학생부터 음란물을 접한다고 하니 잘못된 인식이 싹트기 전에 성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