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그룹 신 회장이 금지옥엽으로 키운 외동딸이라고 들어 꽤 도도할 줄 알았는데 얼굴과 몸매, 상냥한 성격 등등, 이만하면 신붓감으로 합격이었다.
슬슬 선보기도 지겨운데 이쯤해서 이 여자로 정해버릴까? --- p.7
“전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지은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맞선남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난데없이 중요한 일이라뇨?”
그 말에 지은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개똥 치우러 가야 하거든요.”
“뭐요? 개똥?”
“네. 개, 똥.” --- p.8
“에이, 저 혼자만 봉사하나요. ……저기, 그런데…….”
지은은 누구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무료 진료하는 날 아닌가요? 수의사 선생님이 늦으시네요.”
“정우빈 선생님이요?”
‘정우빈’이란 이름 석 자를 듣는 것만으로도 지은의 심장은 ‘쿵’ 소리를 내며 밑으로 떨어졌다.
심장아, 나대지 마, 쫌! 뺨이 달아오르는 것을 막으려 지은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p.9
큰 비용이 드는 유기 동물 보호센터 건립은 그녀 혼자 힘으론 무리였다. 조부에게 수백억이 넘는 SB그룹 주식을 상속받았지만, 결혼 전까진 처분할 수 없어 한마디로 ‘그림의 떡’이었다.
―좋다. 내가 사비를 들여서 사설 센터를 마련해주마. 대신 이번 일요일부터 선봐.
어느 날, 안절부절못하고 끙끙거리는 지은을 지켜보던 신 회장이 휙 미끼를 던졌다. 맞선은 질색이었지만, 유기견 목숨을 담보로 신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p.10
긴 문장이었음에도 제혁은 음절, 문구의 강약을 조절하며 전문 CF모델처럼 가뿐히 소화해냈다. 카메라 앞에서의 다양한 시선 처리 또한 자연스러웠다. 물 흐르듯 촬영이 흘러가자, 지켜보는 관계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컷!”
짝짝짝―. 감독의 입에서 컷 사인이 나오는 동시에 뒤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았어. 역시 민 실장이야!” --- p.12
“좋아해요.”
헉! 난데없는 사랑 고백에 지은은 도로 허겁지겁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괜히 남의 애정사에 끼어들 순 없으니까.
이젠 끝까지 없는 척해야 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 연애 이런 거, 말도 안 된다고 여겼는데……. 언젠가부터 내 시선은 온통 당신을 향하고 있었어요. ……털어놓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 p.16
지은은 엉금엉금 테이블 아래서 기어 나오며 꽉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남자, 완전 싸가지 없네! 싫어한다는 것도 아니고, 좋아한다는데 거절하더라도 좀 상냥하게 하면 안 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지은은 먼지를 털 듯 두 손을 탁탁 털어냈다.
“짝사랑하는 아픔을 당신이 알기나 해?” --- p.18
저 옆에 있는 건, 올리비아가 아니라 나여야 하는데…….
꾹꾹 눌러두었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억지로 선 자리에 끌려 나가는 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그래, 지금 고백하자! 진지하게 사귀는 남자가 있다고 하면 부모님도 더 이상 어쩌진 못할 거야.
지은은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돌아보지 말아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있어 주세요.” --- p.21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눈부신 햇살에 의한 역광 탓에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창가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키고 나서자, 서서히 윤곽이 드러났다.
“헐!”
드디어 완전하게 이목구비가 드러난 순간, 지은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졌다.
키와 어깨의 넓이도 비슷하고, 옷차림도 분명 똑같았지만, 뒤돌아본 남자는 우빈이 아니었다. 저 남자는 아까 연회장에서 보았던?
“어쩌죠? 하루에 두 번이나 고백 받는 건, 영 취미 없는데…….” --- p.22
“이제 그만 따라다녔으면 싶은데…….”
제혁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속에 흘러들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녀에게 한 질문이었지만, 사실 제혁은 그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쓰러지려는 지은을 보는 순간, 손이 자동으로 나갔다. 그녀가 넘어지든 말든 상관없는 일인데……. 그러나 깊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곤경에 처한 모습을 보고 지나칠 수 없었을 뿐이다.
“그쪽, 스토커입니까?” --- p.39
세계 각국을 돌며 성장한 덕분에 지은은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 재능을 살려 통·번역 대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은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었다. 영어는 동시통역 자격이 있고, 불어, 독어, 일어는 원어민처럼, 러시아어, 스페인어, 중국어는 사전 없이 일상 대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맞선 주선자는 그런 경력은 쏙 빼버리고 SB그룹 상속녀라고만 지은을 소개했다. --- p.40
제혁은 한 모금 위스키를 들이켠 후, 말을 이어나갔다.
“설명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내가 조금 희생하는 거라고 해두죠.”
잠자코 귀를 기울이던 지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웃겨요. 우리 모두,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을 보는 거잖아요. 결혼하는 건 우리인데…….” --- p.63
“그래도 안전장치가 필요하니까 간단하게나마 절대로 좋아하지 않기로 계약하죠. 계약을 깨는 쪽이 손해 배상하고.”
“정 원한다면 그래요.”
“어떤 손해 배상을 원합니까? 먼저 정해요.”
“……음.”
지은은 자못 심각한 얼굴로 궁리에 빠졌다. 그녀가 우빈을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길 좋아하게 될 거라고 걱정하는 제혁이 괘씸해서라도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고 싶었다.
“만약에 날 좋아하게 되면, 내가 찍은 여자와 무조건 결혼해요.” --- p.66-67
지은은 기대앉았던 소파 등받이에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까?
첫 번째 연주가 끝나고 강렬한 로큰롤인 두 번째 연주가 이어졌다. 연이어 연주가 이어질 동안 지은은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평소라면 공연은 뒷전이고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 지금의 그녀는 빨려 들어가듯 발코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무대 위의 남자에게선 아찔한 섹시함이 줄줄 흘러나왔다. 눈만 마주쳐도 그 자리에서 홀려버릴 것 같은 느낌이다.
지은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남자가 갑자기 2층 발코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p.82-83
이건?
시원한 향과 뒤섞인 은은한 남성적 체취가 코끝을 자극했다.
……어째서?
지은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남자에게서 익숙한 남자의 향기가 느껴졌다.
“……아.” --- p.84-85
여유롭게 입술을 핥는 모습이 지나치게 섹시하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던 민제혁 실장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왠지 모르게 두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급하게 마신 위스키의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나 보다. 괜스레 속도 답답해지는 것 같아, 지은은 위스키 잔 대신 얼음물이 든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벌컥벌컥, 찬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도 붉어진 뺨은 더욱더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 p.71-72
“그렇다면 날 믿고 따라와요. 지금 수준으론 고백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어차피 우린 교제하는 척을 해야 하니,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 보죠.”
한국말이 분명할 텐데, 지은은 제혁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제혁은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나를 수의사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진도를 나가자는 겁니다. 싫으면 말고. 억지로 할 필욘 없어요.” --- p.113
“이리 가까이 와요. 민 실장, 인사해. 앞으로 내 통·번역을 전담할 신지은 씨야.”
신지은? 익숙한 이름에 제혁은 황급히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믿기 어렵게도 사무 정장 차림의 지은이 눈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왜 여길 들어와? 제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은의 뽀글거리던 머리카락은 생머리로 곱게 펴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제혁과 마주친 지은 역시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이 남자, 왜 여기에 있지?
혼돈으로 흔들리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p.116
진정해! 이건 단지 육체적인 반응일 뿐이야. 인간의 뇌는 긴장하거나 불안하면 신경 전달 물질인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데, 그게 바로 심박 수를 증가하게 하고 얼굴을 붉어지게 하는 주범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단지 불안해서…….
지은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이럴 땐…….”
제혁은 지그시 지은의 눈을 들여다보며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말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눈을 감는 겁니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