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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빨간 맛

스페인의 빨간 맛

: 발렌시아에서 보낸 꿈결 같은 한 해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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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52쪽 | 394g | 140*210*20mm
ISBN13 9791158771621
ISBN10 115877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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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서 살아야겠다.’
어느 날 문득 그렇게 결심이 섰다. 걱정이나 의구심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발렌시아면 될 것 같았다. 오르차타 가게의 여인이 내게 보였던 그날의 확신만큼이나 굳은 결단이었다. 꿈이 참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은 모름지기 꿈을 갖고 살아야 하는 법이고, 꿈을 향해 달리는 인생만이 이상적이고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꿈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인 동시에 때때로 나를 모질게 옭아매는 굴레일 수 있음을, 나는 세월을 통해 시나브로 알아갔다.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목표에 얽매인 삶이 과연 나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던가, 나는 수차례 반문하고 번민했었다. 어쩌면 중요한 건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향성을 잃지 않고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는 거면 충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내 가치관을 잊지 않고 꾸준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떤 예기치 않은 지점에 도착해서도 나는 행복할 거라는 직감을 했다. 그 실례가 이번 여행에 있었다. 여행의 목표에 대한 강박을 지우고 나니 그리도 염원했던 종착지가 비로소 시야에 들어왔다. 목적지를 지운 항해의 끝에서, 나는 발렌시아를 만났다.
--- p.48~49

일찍이 다비드는 나에게 발렌시아의 바다 풍경에 너무 큰 기대를 품지는 말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흔히들 꿈꾸는 카리브해의 크리스탈 빛깔 바다 같은 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정처럼 투명한 바다 색깔, 정열적인 남국의 정취 같은 건 말바로사 해변에 없었다. 바닷물은 내 발이 채들여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탁했고, 여름이면 무더위와 사투하다 바다로 몰려나온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로 인해 모래사장 전체가 누울 자리 하나 없이 빼곡했다. 하지만 말바로사에는 고유의 빛깔이 있었다. 그 유명한 ‘발렌시아 오렌지’를 키워낸 이 도시의 따사로운 햇빛.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햇빛이 발렌시아인들의 온화한 품성을 키워낸 장본이기도 하리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듯한 그 빛깔이 해변 전체를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말바로사의 이 찬연한 광채는, 그 어떤 호화로운 휴양 도시의 강렬한 색감보다도 내 마음에 오랜 잔상을 남겼다. 발렌시아의 바다는 호사스러운 바캉스 대신 적요한 휴식을 선물하는, 말이 없고 우직한 친구와 같았다.

발렌시아의 여름은 듣던 대로 뜨거웠다. 그 무더위를 핑계 삼아 나와 하우스메이트 마리아(Maria)는 틈만 나면 차가운 라들레르(radler) 한 병씩을 들고 말바로사를 찾았다. 우리의 유월과 칠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마리아는 후에 이 시간을 그녀 인생 최고의 여름이라고 추억하곤 했다.
--- p.134~135

“일단 이곳의 날씨가 좋았어. 내가 살던 파키스탄 도시도 이곳처럼 연중 해가 뜨는 곳이었지.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이 좋았어. 친절하고 열려 있는 발렌시아인들은 그야말로 ‘친구들(Amigo)!’이거든. 또 이곳엔 바다가 있고, 역사가 있고, 관광이 있고… 뭐 부족할 게 없는 도시잖아. 나는 발렌시아에 오기 전에 마드리드에서 7년 간 일했었어. 하지만 마드리드 사람들은 차갑고 슬펐어. 난 지금 마드리드에서보다 훨씬 적은 돈을 벌고 있지만, 발렌시아에 살면서 훨씬 큰 행복을 느껴. 그거 아니? 발렌시아에서 운전할 땐 길을 잘못 들어도 괜찮아. 바로 다음 코너에서 되돌아가면 되거든. 하지만 마드리드에서 한 번 길을 잃잖아? 그럼 좋으나 싫으나 그대로 한 10킬로는 쭉 가야만 하는 거야. 마드리드에서의 삶은 얼마나 복잡하던지!”

발렌시아에선 길을 잃어도 괜찮아. 아저씨의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다. 도시는 그 넉넉한 품 안으로 모든 이들을 차별 없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품 안에서 깊은 안정감을 누렸다. 그 평온에 관한 기억으로 아저씨와 내가 공감대를 이루기까지 우리의 어휘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저씨는 이번에는 길을 잃지 않았다. 나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고, 우리는 서로의 행운을 빌며 산뜻한 작별을 고했다. 떠나가는 택시가 시야에서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내 눈 앞으로 투리아 정원의 진한 녹음이 펼쳐졌다. 치켜든 얼굴 위로는 따사로운 햇살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큰 숨으로 힘껏 들이마셔본 도시의 공기가 제법 상쾌했다.
--- 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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