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눈을 감았다 싶었는데 한기가 들어 눈을 도로 떴다. 컴퓨터는 동영상 하나를 끝내고 가만히 멈춰 있다. 열 시가 넘었는지 헤드폰 소리 너머로도 들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헤드폰을 치우려고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목이 움직이지 않는다. 시야에는 아이들만이 아니라 아무도 없다. 점원조차도 없다. 형광등이 깜박거리는 음료수 냉장고 옆에 몸을 구부정하게 숙인 사람의 윤곽만이 보였다.
그 검은 윤곽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준은 마취라도 당한 것처럼 의자에 고정되어 그것을 지켜보았다. 윤곽이 시야 가장자리로 스며드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의 경계에서 검은 윤곽이 얼굴을 들이댔다. 색깔 아닌 색깔의 눈이 살을 벗기는 듯한 시선으로 영준의 얼굴을 훑었다. 입이 열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그 안에 있었다. 아까 본 영화 예고편이 떠올랐다. 캄캄한 입안에 무수한 별들이 보였다.
영준은 어느새 별들 사이에 있었다. 우주는 어둡되 검지 않았다. 이름 없는 색깔들이 사방을 밝히고 있다. 처음 들어보는 기묘한 불협화음이 저 멀리에서 우주의 진공을 타고 영준의 뇌를 어루만졌다. 어둠과 색깔의 바다에 영준은 혼자 떠 있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다. 이제는 이름을 하나하나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저 색깔들이야말로 영준의 친구요, 가족이었다.
--- pp.46-47
“강 선생님!”
영준은 소리를 쳤다. 강가 아파트 건물들에 반사된 메아리만 으스스하게 돌아왔다. 잔디밭에 엎드렸다. 무릎이 식어오는 것도 아랑곳 않고 핏자국을 살폈다. 캄캄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잔디밭을 점점이 물들이고 있다. 타이어 자국이 보였다.
지저분한 붉은색 길이 십 미터 정도 앞, 가로등과 가로등의 중간 어두운 도로변까지 타이어 자국을 따라서 나 있었다. 영준은 갑자기 어지러워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뺨과 귓불을 벨 것처럼 찼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맑아 별들이 잔뜩 보였다.
몸을 일으켰다. 영준의 머릿속에는 강 선생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한겨울 강가의 추위도, 지난 반년 동안 쌓인 피로도 그저 사소하게만 느껴졌다.
--- pp.50-51
영준은 흙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도랑에 누워 있다. 멈춰 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전에 봤던 그 금테 안경의 통통한 남자를 비춘다. 굳은 낯빛에서 두려움과 약간의 죄책감이 병자의 단내처럼 풍긴다.
안경 남자가 수그리고 앉는다. 말이라도 하려는가 싶었지만, 남자는 비포장도로 가장자리에 널브러진 지푸라기와 마른 풀을 영준에게 뿌린다. 그러나 바닥의 풀을 다 모아도 자기의 죄책감은커녕 눈앞의 몸뚱이조차 덮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 포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차로 돌아간다.
통증이 둔해지고 머리가 가벼워진다. 차갑게 마른도랑에서 피를 흘리며 영준은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족을, 친구들을 생각했다. 떠오르는 것은 얼굴도 기억도 아닌, 강렬하지만 막연한 감촉들이다. 캄캄한 밤하늘 저편에서 찾아오는, 형체 없는 온기다.?
영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위로 뻗었다. 하늘 멀리 맴도는 그 온기를 맞이하고 싶었다. 이 부서진 몸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돌아갈 집을 간절히, 간절히 그렸다.
그 그리움에 영준의 마음이 달구어졌다. 저 멀리 밤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던 색깔 아닌 색깔, 빛 아닌 빛이 마음속에서 세게 불타올랐다. 머리가 뜨거워졌다. 영준은 더 간절히 마음속 빛에 불을 지폈다.
--- pp.84-85
카페 안도, 두 잔째 커피도 따뜻했다. 커피를 마셨는데도 기분 좋은 졸음이 찾아왔다. 눈이 감겼다가 떠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영준의 눈앞에 별이 가득한 하늘이 펼쳐졌다. 무언가가 노래 같은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영준은 손을 뻗었다.
길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경적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느새 길에는 차가 가득했다. 이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대로로 나오는 길목을 지나지 못하고 기다리는 차가 보였다. 은색 중형차다. 영준은 홀린듯 일어났다. 외투를 챙기는 사이, 신호가 바뀌고 길에 늘어섰던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준은 외투를 걸치지도 못하고 손에 든 채로 카페 밖으로 뛰어나갔다. 문에 달린 종이 크게 울렸다.
영준이 지하 주차장 입구에 다가갔을 때 은색 중형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영준은 거리를 채운 사람들을 어깨로 밀치며 달렸다. 익숙하게 따가운 시선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오는 것을 다시 느꼈지만 신경쓰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번호판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pp.114-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