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다독임에는 늘 ‘말’이 있었다.한밤의 다독임에는 늘 ‘책’이 있었다.뭉근한 다정함으로 위로할 줄 아는,시인 오은의 ‘마음’을 끄덕이게 하는 이야기!시인 오은의 신작 산문집을 펴냅니다. 2020년 3월 28일 이 아린 봄에 펴내는 시인의 산문집 제목은 『다독임』. 8년 전 같은 날 선보였던 『너랑 나랑 노랑』에 이어 출판사 난다에서 나란히 펴내는 시인의 두번째 책이기도 합니다. 가만, 시간이 좀 흘러 『너랑 나랑 노랑』이 무슨 책인데? 하시는 분도 혹여 계실 수 있겠다 싶어 살짝 설명을 해드리자면 시인이 레드, 블루, 블랙, 그린 옐로, 화이트를 기저로 한 회화 30점을 가지고 써나간 감상기라고나 할까요.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아온 익숙한 그림들을 대상으로 한 평탄한 읽기를 포기하고 시인만의 고집으로 눈에서 놓지 못한, 낯설면서도 어딘가 불편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그러나 미의 선두에 있음직한 그림들을 대상으로 한 험난한 읽기를 선택하여 두툼하게 꾸려낸 독특한 미술 산문집이었지요. 그림을 보는 시선에 다분히 리드미컬한 시의 음률을 적용하였으니 이 책은 회화론이자 시론으로도 읽힌다 감히 자부하는데요,『다독임』을 선보이는 김에 새 표지로 갈아입힌 『너랑 나랑 노랑』도 관심으로 한번 읽어봐주셨으면 하네요.『다독임』은 지난 2014년 10월부터 2020년 3월까지 시인 오은이 여러 매체에 쓴 글 가운데 모으고 버린 뒤 다듬은 일련의 과정 속에 남은 이야기들을 발표 시기에 따라 차례로 정리하여 묶은 산문집입니다. 크게는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이 두 축을 이루고, 『대산문화』에 발표한 글을 한 편 섞었는데요, 원고 가운데 2016년 6월 1일 경향신문에 쓴, 『다독임』의 108쪽에 실려 있는 「이유 있는 여유」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바 있기도 하지요. 2014년부터 2020년까지 특유의 성실성으로 세상 돌아가는 회오리 속에 제 몸을 던져 제 눈이 맞닥뜨린 일상을, 제 손이 어루만진 사람을, 제 발이 가 업은 사랑을 시인은 또박또박 기록해냈는데요, 은유와 비유와 상징이 저글링을 하듯 말을 부리고 사유를 돌리던 시들과는 뭐, 장르가 다른 산문이기도 하니까요,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정직함과 친절함과 투명함이 크나큰 미덕이구나 싶기도 한 책입니다. 소실점이 미술로 모이던 시인의 전작 산문집 『너랑 나랑 노랑』은 뭐, 장르가 같은 산문이기도 하나, 그 주제적인 측면에 있어 ‘일상’이라는 ‘우주’를 그만, 건드려놓음으로써 이야기의 보편성을 크게 확장시켜버리고 있구나 싶기도 한 책입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음의 사실 말고는 확언할 수 없고 단언할 수 없는 우리들의 삶, 그 존재함에 관한 이야기. 그 ‘있음’이라는 희망 아래 그 ‘있음’의 진짜배기 사유를 발견하기까지 시인은 포착하고 관찰하고 그 ‘있음’의 그대로를 ‘일기’처럼 써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듯해요. 평범한 매 순간이 특별한 매 순간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그 과정을 유난스럽지 않게 떠벌리는 시인만의 천진성이 크게 한몫을 했다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천연한 시인의 글로 말미암아 우리가 시인의 ‘그때그때 그 순간’마다 동행하게 되는 데는 읽는 우리들과 눈의 높이를 맞추고 발의 보폭을 맞추는, 시인의 작정했으나 티 나지 않은 배려가 작동했을 거라고도 보고요. 그 행동거지 뒤에는 바로 이러한 목소리로 등을 다독인 어떤 목소리가 배어 있기도 하거니와……무엇보다 아빠가 한 말이 산문 쓰기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은아, 신문에 실린 글은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이잖아. 이번 글은 좀 어렵더라.” 한 달에 한 번 아들의 글이 신문에 실리던 날을 누구보다 기다리던 아빠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의 모든 부기를 빼려고 애썼다. 아빠가 말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에는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말」, 8쪽.『다독임』이 품고 있는 시간이 2014년부터 2020년이다 보니 그 사이 우리 정치 역사 경제 문화 등의 변모 곡선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던 시기, 그에 따라 출렁임이 크고 잦았던 우리들 마음이라는 그 심지. 특히나 시인은 그 사이에 아팠던 사람들, 사랑했던 이들을 꽤 떠나보내는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시인과 평소에 가까웠던 고 황현산 평론가나 고 허수경 시인, 그리고 시인의 아빠와의 추억을 자주 이 책에 부려놓음으로써 슬픔을 공유하곤 했는데요, 울고 남은 힘으로 이 산문을 써나갈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던 데는 이런 힘을 제게 부여할 수 있어서가 또한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독이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돌아보는 일, 그때마다 더 큰 위로를 받은 쪽은 나였다.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한 단상이 이 책에 실린 글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살폈던 이 마음 저 마음을 다 싣다 보니 애초에 모인 산문만 1500매에 달했는데요, 와중에 3분의 1가량, 근 100페이지 가까이를 한데 묶는 가운데 가감 없이 과감하게 버리기도 했는데요, 이는 그가 특별히 알뜰히 살펴온 것이 ‘마음’이라는 데서 그 단호함의 연원을 살펴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였어요. 마음을 부리는 데 있어 특히 거리를 가져야 할 ‘엄살’이라든가 ‘억지’라든가 ‘푸념’이 마음의 도량에서 조금만 수위를 높여도 시인은 제 글로부터 싸늘히 식은 마음을 가져버렸으니까요. 마음, 그렇지요, 마음. 마음이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내 안에 있는 그것의 어려움, 타인이 만져주거나 말해주어야 들키고 알 것 같은 내 마음. 시인 오은의 산문은 그런 우리들의 마음을 그의 특기인 말의 부림으로 우리 앞에 꺼내놓지요. 다독임은 나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 행하기보다 나보다 힘이 약한 사람에게 절로 하는 행위라 할 수 있지요. “남의 약한 점을 따뜻이 어루만져 감싸고 달래다”가 다독임이라 할 때 이 책의 미덕 역시 그 지점에서 발휘된다고 할 수 있지요. 다독임은 어떤 해결을 위해 나서는 손이 아니어요. 다독임은 어떤 질책을 위해 들리는 손이 아니지요. 다독임은 달램이지요. 달램 이후의 방향성에는 저마다의 능동성이 요구되는 바이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와 독자가 함께 읽고 함께 써나가는 몸으로 하나가 되는 책이 아닐까 해요.마음을 보다 잘 이야기하기 위해 예로 든 카드가 시인 오은에게는 ‘책’이라지요. 다독(多讀)의 시인 오은이 글로 써나간 『다독임』의 순간들. 특히나 시인의 산문은 우리말을 풍부히 쓰는 데 그 역량을 재미로 확산시킨 까닭에 어른이나 아이나 구분 없이 읽기에 참 좋다 싶습니다. 그만큼 산문을 쓰는 데 있어 활용했을 국어사전의 페이지 페이지마다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기도 해요. 국어사전을 내 옆에 가까이 두었을 때 우리말이 내 곁에 가까이 두어지는 일. 소리 내어 시인의 산문을 읽는 일로 아름다운 그 경험 또한 누려보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부기로 표지에서 만나게 되는 그림 한 컷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화가 신소영의[너랑 같이]라는 작품인데요, 표지 속 아이가 가슴이라지만 비유컨대 분명 마음일 심장 가까이 애착 인형과 같은 곰을 끼워둔 것이 두루 여러 생각을 갖게 합니다. 애잔하죠. 그러나 아이에게는 참으로 든든할 것 같죠. 어쩌면 ‘다독임’이라는 말이 ‘너와 같이’라는 말이 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존재도 그 순간만큼은 괜찮아지게 만드는 말이 아닐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 마음을 살게 만드는 이 다독임에 여러분의 손도 한번 내밀어보심이 어떨는지요.작가의 말다독이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돌아보는 일지난 10여 년간, 나는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막힘없이 앞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보이지 않는 벽이 앞을 가로막는 일이 많았다. 그때마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때도,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확인할 때도, 혹여 놓친 것은 없는지 살필 때도 나는 늘 뒤를 향해 있었다.돌아보는 일은 크게 네 가지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첫번째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보는 일이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빠뜨린 것들이 어김없이 있었다.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있는 줄도 몰랐을 것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거기에 있었다. 거기를 향해 심신이 기울어졌다.두번째로 지난날을 다시 생각하는 일이다. 흔히 미래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과거를 더듬지 않으면, 현재를 응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매일매일 고개를 돌려 예전을 헤아리는 시간을 가졌다. 나를 크게 웃게도, 많이 울게도 만들었던 것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것들 때문에, 아니 덕분에 나는 이런 사람이 된 것이다.세번째로 돌아다니면서 두루 살피는 일이다. 산책이 중요한 일과가 되면서, 나는 단순히 걷는 일을 넘어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걸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미 딴생각이었다. 밥을 먹고, 밥을 먹게 해주고, 보이는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어내는 일과는 전혀 동떨어진 무엇이었다. 딴생각을 하며 걷다가 우연히 바라본 곳에는 늘 무언가가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그 무언가가 딴생각의 꼬리를 또다시 잡아당겼다.마지막으로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일이다. 몸이 바빠지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반대로 허기졌다. 하루하루가 빽빽했지만, 그 안에 내가 숨쉴 틈은 없었다. 일에 파묻혀 사는 내내, 나는 많은 존재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사랑하는 사람도, 다육식물도, 사들이기 바빴던 책도 나를 견디지 못했다. 아주 오래는 기다려주지 못했다. 잘살기 위해 애쓰다가 어느새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인데, 내가 아닌 것 같았다.어느 순간, 돌아봄이 돌봄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가족을 돌보고 가까운 이들을 챙기고 반려식물에 물을 주고 단어를 돌보며 책을 껴안는 일, 그것은 나의 숨통을 틔우는 일이기도 했다. 한밤의 다독임에는 늘 책이 있었다. 다독(多讀)하는 일은 많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했다. 나와는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게 없는 사람에게조차 눈길이 갔다. 나도 모르게 다독다독 감싸고 달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듭하고 있었다.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에 살지만, 늘 그때 거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었다.지난 2년 사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아팠다. 황현산 선생님, 허수경 누나, 그리고 우리 아빠…… 울지 않기 위해 시를 쓰는 날이 이어졌다. 울고 남은 힘으로는 산문을 썼다. 안 써본 이야기를 끄집어내준 『대산문화』,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귀한 지면을 내어준 한국일보와 경향신문에 감사드린다. 마감이 있다는 사실은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어찌어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어 거친 숨을 쉬게 만들어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 없지만, 그때 거기가 있기에 나는 여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보듬다, 감싸다, 쓰다듬다, 다독이다, 어루만지다 같은 동사에 마음을 내준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직접 할 때 역설적으로 찾아오는 것이기도 했다. 다독이러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돌아보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더 큰 위로를 받은 쪽은 나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온기에 큰 신세를 졌다. 이 책의 제목을 짓고 글들을 솎고 엮어 한 편 한 편 다독여준 민정 누나, 꼼꼼하고 다정하게 한 문장 한 문장 살펴준 필균 누나와 성원이, 세심한 배려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빛날 수 있게 애써준 디자이너 한혜진님에게도 저 단어들을 빚지고 있다.만약 들어가지 않았다면 돌아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용기 없는 내가 발 들인 그곳에는 힘없는 것들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있었다. 막힘없음이 힘없음이 되고 힘없음이 다시 힘입음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를 잊지 않기 위해 메모한 단상이 이 책에 실린 글이 되었다. 돌아볼 기회가 있었기에 나는 길 위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지면 위에서 고꾸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무엇보다 아빠가 한 말이 산문 쓰기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은아, 신문에 실린 글은 성별,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이잖아. 이번 글은 좀 어렵더라.” 한 달에 한 번 아들의 글이 신문에 실리던 날을 누구보다 기다리던 아빠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 안의 모든 부기를 빼려고 애썼다. 아빠가 말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에는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다독다독은 의태어지만 다독이거나 다독임을 당할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어떤 소리를 듣는다. “괜찮아, 괜찮아”라는 뭉근하고 다정한 위로가 들릴 때도 있고 “괜찮아? 괜찮은 거지?”라는 다급한 물음이 들릴 때도 있다. 어느 것이든 괜찮은 사람이 괜찮지 않은 존재에게 건네는 말이다. 하는 사람도, 그것을 듣는 존재도 그 순간만큼은 괜찮아지게 만드는 말이다.마침내 나를 살게 만드는 다독임이다.2020년 3월오은